[음재훈의 실리콘밸리 인사이더] 경쟁 치열한 실리콘밸리의 숨은 고민, 우울증

음재훈 실리콘밸리 벤처투자가 2021. 10. 1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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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팀 쿡 CEO(최고경영자)가 지난 10일 자기 트위터에 “정신 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최근 언론 인터뷰에선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 정신 건강에 타격을 받고 있다’고 고백했다. 기술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혹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도 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정신건강연맹(WFMH)이 제정한 10월 10일 ‘세계 정신 건강의 날’을 맞아 꺼낸 얘기였다.

/일러스트=이철원

얼마 전 구글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는데, “연초엔 코로나 증상이나 백신 검색어의 순위가 높았는데 최근에는 번아웃(burnout)을 검색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번아웃은 극심한 신체·정신적 피로 상태를 뜻한다. 직장인은 1년 넘게 지속된 원격 근무에 지쳐있고, 학생들은 코로나 때문에 학교 생활의 즐거움을 뺏겼다고 생각해 화가 많이 나있다. 부모들은 아이들 교육 걱정, 직장과 가정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경쟁이 치열하고 동료 집단의 압박(Peer Pressure)마저 큰 실리콘밸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언업(Earnup)이라는 잘나가던 핀테크 스타트업 대표가 스트레스를 이유로 CEO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었다. 그는 CEO의 중책을 맡아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지만, 밤낮으로 목표 달성에 매달리다 보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그러다 정신 건강을 넘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결국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공유하고, 정신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벤처투자 업계도 마찬가지다. 2007년 초 필자와 반도체 업체에 공동 투자하는 등 협업해 왔던 한 벤처투자자가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이 있었다. 잘나가는 일류 벤처캐피털 회사 출신에, 성격도 워낙 좋고 항상 농담을 잘하는 친구라 당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른 공동 투자자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우울증이 얼마나 위험한지 마음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됐다.

밖에서 보기에 잘나가는 실리콘밸리 거대 테크기업 임직원, 스타트업 창업자, 벤처투자자 할 것 없이 많은 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요즘 실리콘밸리에 있는 정신 상담 치료사 중에는 새 고객을 받지 않는 이가 많다. 기존 고객만으로도 너무 바빠서다. 이런 수요공급의 불균형을 풀어가는 건 테크기업들이다.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낸 문제를 또 다른 테크놀로지가 풀어나가는,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모습이다.

스스로 정신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앱은 많지만 그중 캄(Calm), 헤드스페이스(Headspace), 인텔렉트(Intellect)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 가치 2조원 이상의 유니콘이 된 캄은 온종일 줌(Zoom·화상 채팅앱) 미팅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명상을 제공한다.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도록 도우며 돈을 번다. 지난해 12월 투자 유치와 함께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앱 다운로드는 1억건 이상, 유료 고객 역시 400만명이 넘는다.

헤드스페이스도 이 분야의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2010년 영국에서 창립했고 현재는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초보자도 쉽게 명상할 수 있도록, 온라인·앱을 통해 명상 지도자의 안내 음성·영상을 제공한다. 지난 8월 진저(Ginger)라는 정신 건강 서비스 업체를 인수하며 기업 가치가 3조원을 넘어섰다. 진저는 정신 건강 전문 코치들이 특정 기업의 직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상담해주는 B2B(기업 간 거래) 모델의 서비스다.

인텔렉트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으로 아시아 12국에 진출했다. 기업 고객이나 보험사 등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건강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본인의 정신 건강 문제를 잘 드러내지 않는 동양 문화권에서도 이용자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서로 비교도 많이 한다. 실제로 한국의 많은 사람은 갖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런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인지는 의문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정신 건강 관리를 위해 명상 앱을 이용하고, 기업도 직원들의 정신 건강 상담을 위해 각종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내 스타트업을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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