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저항과 포기와 충성 사이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2021. 10. 1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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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저항(Voice)할 것인가, 포기(Exit)할 것인가, 충성(Loyalty)할 것인가.

위기의 순간에 소수자가 선택 가능한 방법들이다. 세 가지 선택지를 벗어난 초인적인 행동 계획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예컨대 무력으로 제압해 생존하겠다는 방식은 애당초 소수자가 선택 가능한 게 아니다. 소수자는 커다란 세계 속 티끌로 취급받는 자기 존재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상대에게 항의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충성할 것인지 고민한다.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오징어 게임> 속 여성, 노인, 외국인 노동자 참가자는 탈락 최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저마다 다른 생존 전략을 택했다. 사기 전과 5범의 여성 참가자는 자신을 버리고 줄다리기팀을 꾸린 조폭을 향한 ‘저항’을, 뇌종양 투병 중인 노인 참가자는 2인 1조 팀 구성에서 자신을 기피하는 참가자를 보며 ‘포기’를, 외국인 노동자 참가자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수석 입학한 엘리트에 대한 ‘충성’을 택했다.

세 참가자 모두 스스로 살아남기에는 미약했다. 게임을 주도할 만한 건장한 신체 능력도, 충분한 의사소통 능력도 뒷받침되지 않는 작은 존재들이었다. 낙천적인 주인공의 극복 정신도, 냉정한 악역의 생존 계획도 갖지 못한 약자였다. 이들의 생존 전략은 게임을 향하기에 앞서 대부분 강자와의 관계로 향했다.

돌이켜보건대, 중증장애인으로서 내 삶 또한 앞선 이들의 생존 전략과 같았다. 상대를 향한 저항과 포기, 충성의 연속적인 선택을 거듭하며 스스로를 지켰다. 상대를 살필수록 내가 살 수 있는 역설적인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에는 포기가 최선의 생존 방책이었다. 비장애인의 삶의 리듬을 깰까 봐 두려웠다. 학창 시절 체육시간도, 소풍도, 졸업여행도 함께하기를 포기했다. 스스로 택한 고립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 느꼈다. 심리적으로 외로울지언정 물리적으로 폐를 끼치지 않는 존재라며 스스로 다행이라 여겼다. 보이지 않는 장애인으로 살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상대에게 충성해 나를 지키려 했다. 소수자는 오직 다수 안에서만 상대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존재론적 한계를 직감한 뒤로, 다수의 말과 규칙에 따랐다. 착한 장애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에서 차별받는 이들과 약한 이들이 수없이 스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순순히 포기할수록, 얌전히 충성할수록, 다음 게임의 진행을 위한 희생양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지금이라도 나와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겠다 생각하고, 거리에서 삶의 존엄과 권리 보장을 외쳤다. 생애 처음 저항하는 삶을 택하며 나쁜 장애인이 되었다.

누군가 내게 어차피 소수자는 저항, 포기, 충성의 생존 전략 중 무얼 고르건 결국 탈락할 운명이라 무의미하다고 평가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오징어 게임>에서 포기와 충성을 택한 참가자들은 타인에 의해 자기 운명의 향방이 결정됐지만, 끝까지 저항한 참가자는 원수를 붙잡아 자신과 함께 탈락시켰다. 두 사람은 타인의 성공을 위해 희생당했지만, 저항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삶을 주도했다.

저항, 포기, 충성 사이에 망설이는 나와 당신, 무엇을 고르건 생존과 존엄 중 하나만 택하지 말자. 같이 지키자.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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