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 지친 조선 청년.. 꿈꾸던 세상을 글로 펼치다

조성민 입력 2021. 10. 19.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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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주 '숙수념' 첫 완역본 발간
19C 입신양명 대신 은거 택한 26세 청년
마음껏 재능 펼칠 수 있는 유토피아 구상
문사들 함께 기거 문예·학술 공동체 꿈꿔
토론·창작 일상화.. 새 저술·출판 이어져
도서관 등 온갖 글 모여 '인터넷' 역할
공부시간표·필독서 목록 등 각종 지침도
'책 내용 관념일 뿐' 강조.. 저자 고뇌 드러나
"당대 제자리 못찾은 지식인의 슬픔 표현"
홍길주의 상상의 세계 ‘숙수념’을 박무영 교수가 해석하여 새로 그린 그림 ‘숙수념도’. 배산임수의 지형, 완벽한 자연조건에 자리 잡은 별세계가 보인다. 그림 임경선. 태학사 제공
대선 정국인 요즘 국민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치인들의 말이 자주 들린다. 그 공약들 맨앞에는 20∼30대 청년세대를 위한 방안들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우리 청년들이 희망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취업, 결혼 등이 어려울 뿐 아니라 노력해도 보상받기 어려운 상황에 자포자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이런 청년이 있었다. 1811년 26세에 스스로 과거를 포기한 홍길주는 은거의 길로 접어든다.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벼슬길이 막히자 그 재능은 당대에 빛을 보기 어려웠다. 그는 독서지사를 자청하며 현실을 비판하고 저술활동에 매진한다. 이를 집대성한 작품이 ‘숙수념(孰遂念, 1829)’이다.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줄까’라는 의미에 숙수념은 조선 시대를 살았던 이색적인 지식인이 젊은 시절 펼치지 못했던 이상향을 담고 있다.
조선후기 홍길주가 쓴 ‘숙수념’ 표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 청년이 꿈꾸던 세상

비록 관직에 나가지 못했지만, 홍길주의 저서는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는다. 기발한 발상과 절묘한 구성으로 마치 귀신이 얽어 놓은 듯 변화를 백출하면서 그 속에 사상 감정을 짙게 담아내는 문장가. ‘천 년 뒤의 장자요 사마천’이라 불리기도 한 그의 저서 ‘숙수념’은 최근 연세대학교 박무영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완역됐다.

‘숙수념’에는 저자가 20대에 입신양명의 길을 포기하고 칩거하며 고민했을 문제의식이 녹아들어있다. 조선 청년이 꿈꾸던 세상은 학술과 문예의 공간이다. 수많은 문사들이 함께 기거하면서 토론, 창작, 놀이를 한다. 이런 일상적 활동이 새로운 저술과 창작, 출판으로 이어진다. 현대로 따지자면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하게 갖춰져 젊은이들이 경쟁에 매몰되지 않고 맘껏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사회다.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물도 자연스럽게 받아볼 수 있다.

이곳에는 상상의 세계에 필요한 온갖 종류의 글이 모여있다. 건물마다 건물기(建物記)와 상량문이 있고, 예론(禮論)에서 논란이 있는 영당(影堂)을 세웠으니 영당에서 지내는 제사에 대한 논술이 있다. 건물 내부를 채우는 기물들의 기물명(器物銘)이 있으며, 새로 고안된 기물에는 그 제도를 설명하는 도면과 설명문도 있다. 거대한 도서관과 출판소가 있어서 그곳의 책에 관해서도 서술하며, 책마다 서문과 발문이 있고, ‘작가의 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앞으로의 저술에 대한 기획안도 있다.

각자의 직책을 수행하는 구성원들이 준수할 지침과 훈계, 즉 ‘잠(箴)’과 ‘계(誡)’가 있고, 각종 의례가 이곳 사람들의 삶에 질서를 부여한다. 의례의 절차를 명시한 의례식(儀禮式)이나 의식문도 필요하며, 학술과 문예를 함께 하는 공동체가 이 공간의 핵심이니, 일상의 토론이나 대화 내용도 기록되어야 한다.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과 함께하기 위한 문학 게임의 매뉴얼과 저택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관련한 훈계나 지침, 학업 내용과 학사 일정에 대한 규정, 공부 시간표와 필독서 목록도 들어 있다.
조선후기 홍길주가 쓴 ‘숙수념’ 내용. 16권 7책. 필사본. 규장각 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지식인의 슬픔

자신의 이상을 글로 후대에 남겼지만, 당시 홍길주가 느꼈을 자괴감은 오늘날 우리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 ‘숙수념’에서 그가 ‘관(觀)·념(念)’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책의 내용이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해 비극적인 색채를 풍긴다. 박 교수는 “숙수념은 세상에서 자기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이 마지막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다”라며 “이 책 제목은 슬프다. 당대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한 지식인의 슬픔과 자의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책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주랴’에서 ‘16관 계(癸). 숙수념’에는 그런 저자의 고뇌가 드러난다. “항해자도 어릴 때는 우주 끝까지 자유롭게 다니고 사방 바다(四海)를 타 넘어 건너려는 뜻이 있었다. 자라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이윽고 책을 읽고 수양해서, 요·순·공자·맹자 같은 여러 성인에 필적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좀 뒤에는 국가를 보좌해서 태평성대를 이루고, 이 백성들을 평화롭고 밝은 땅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중략) 얼마 되지 않아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중략) 붓을 잡고서 책에다 쓰니, 쌓여서 십여만 마디 말이 되었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에 따르면 저자 항해 홍길주는 1786년 7월1일 족수당 홍인모(足睡堂 洪仁謨, 1755∼1812)와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 1753∼1823)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석주를 비롯한 홍길주, 홍현주, 홍한주 등의 문인을 배출한 풍산 홍씨((豊山 洪氏)는 19세기를 대표하는 경화세족(京華世族)이자 문한세가(文翰世家)다. 홍길주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 독서지사를 자처하며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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