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 지친 조선 청년.. 꿈꾸던 세상을 글로 펼치다
19C 입신양명 대신 은거 택한 26세 청년
마음껏 재능 펼칠 수 있는 유토피아 구상
문사들 함께 기거 문예·학술 공동체 꿈꿔
토론·창작 일상화.. 새 저술·출판 이어져
도서관 등 온갖 글 모여 '인터넷' 역할
공부시간표·필독서 목록 등 각종 지침도
'책 내용 관념일 뿐' 강조.. 저자 고뇌 드러나
"당대 제자리 못찾은 지식인의 슬픔 표현"
비록 관직에 나가지 못했지만, 홍길주의 저서는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는다. 기발한 발상과 절묘한 구성으로 마치 귀신이 얽어 놓은 듯 변화를 백출하면서 그 속에 사상 감정을 짙게 담아내는 문장가. ‘천 년 뒤의 장자요 사마천’이라 불리기도 한 그의 저서 ‘숙수념’은 최근 연세대학교 박무영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완역됐다.
‘숙수념’에는 저자가 20대에 입신양명의 길을 포기하고 칩거하며 고민했을 문제의식이 녹아들어있다. 조선 청년이 꿈꾸던 세상은 학술과 문예의 공간이다. 수많은 문사들이 함께 기거하면서 토론, 창작, 놀이를 한다. 이런 일상적 활동이 새로운 저술과 창작, 출판으로 이어진다. 현대로 따지자면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하게 갖춰져 젊은이들이 경쟁에 매몰되지 않고 맘껏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사회다.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물도 자연스럽게 받아볼 수 있다.
이곳에는 상상의 세계에 필요한 온갖 종류의 글이 모여있다. 건물마다 건물기(建物記)와 상량문이 있고, 예론(禮論)에서 논란이 있는 영당(影堂)을 세웠으니 영당에서 지내는 제사에 대한 논술이 있다. 건물 내부를 채우는 기물들의 기물명(器物銘)이 있으며, 새로 고안된 기물에는 그 제도를 설명하는 도면과 설명문도 있다. 거대한 도서관과 출판소가 있어서 그곳의 책에 관해서도 서술하며, 책마다 서문과 발문이 있고, ‘작가의 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앞으로의 저술에 대한 기획안도 있다.
자신의 이상을 글로 후대에 남겼지만, 당시 홍길주가 느꼈을 자괴감은 오늘날 우리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 ‘숙수념’에서 그가 ‘관(觀)·념(念)’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책의 내용이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해 비극적인 색채를 풍긴다. 박 교수는 “숙수념은 세상에서 자기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이 마지막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다”라며 “이 책 제목은 슬프다. 당대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한 지식인의 슬픔과 자의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책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주랴’에서 ‘16관 계(癸). 숙수념’에는 그런 저자의 고뇌가 드러난다. “항해자도 어릴 때는 우주 끝까지 자유롭게 다니고 사방 바다(四海)를 타 넘어 건너려는 뜻이 있었다. 자라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이윽고 책을 읽고 수양해서, 요·순·공자·맹자 같은 여러 성인에 필적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좀 뒤에는 국가를 보좌해서 태평성대를 이루고, 이 백성들을 평화롭고 밝은 땅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중략) 얼마 되지 않아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중략) 붓을 잡고서 책에다 쓰니, 쌓여서 십여만 마디 말이 되었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에 따르면 저자 항해 홍길주는 1786년 7월1일 족수당 홍인모(足睡堂 洪仁謨, 1755∼1812)와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 1753∼1823)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석주를 비롯한 홍길주, 홍현주, 홍한주 등의 문인을 배출한 풍산 홍씨((豊山 洪氏)는 19세기를 대표하는 경화세족(京華世族)이자 문한세가(文翰世家)다. 홍길주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 독서지사를 자처하며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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