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가 곧 돈.. 워털루 승전보 먼저 입수, 주식·채권 20배 차익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2021. 10. 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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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新유대인이야기] [21]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중> 영국 시장을 장악하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아들 5형제 중 가장 두뇌가 비상했던 셋째 네이선은 21세에 영국 맨체스터로 건너가 면직물을 사서 독일 게토의 본가로 보냈다. 당시 영국 직물업은 석 달 외상 거래가 관례였으나 네이선은 현찰로 가장 좋은 물품을 가장 싼 가격에 사 가격과 품질로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네이선은 무역업만으로는 한계를 느끼자 면직물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원단을 구입해 이를 염색업자들에게 보내 예쁘게 물감을 입힌 후 다시 봉제업자들에게 보내 원하는 스타일의 제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중간 마진을 절약해 이윤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며 네이선이 거두는 이윤도 점점 박해졌다.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을 때, 로스차일드 가문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입수하는 정보력으로 채권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워털루 전투 때는 영국 왕실보다 이틀 먼저 승전보를 입수해 채권 투자에 활용,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샀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본격적 국제 유대 자본이 태동한 것이 이 시기다. 프랑스 전쟁 화가 앙리 펠릭스 에마뉘엘 필리포토의 1874년작 ‘워털루 전투: 진영을 짜고 프랑스 중기병의 진격에 맞서는 영국군’,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제조업 1년 벌 돈, 금융은 석달만에

네이선은 제조업보다는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100만 파운드의 대형 주문을 받아 1년 동안 수백 명의 기술자들이 땀 흘려 수출하면 5만 파운드 정도 남는 데 비해, 금융기관은 직조 자금 100만 파운드를 석 달간 빌려주고 단번에 비슷한 금액을 버는 걸 보고 크게 깨달았다. 큰돈을 벌려면 제조업이 아니라 금융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금융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이윤이 큰 전시(戰時) 공채를 취급하기 위해 1803년 맨체스터와 런던을 오가며 무역업과 금융업을 병행했다. 이때 의외의 기회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걱정한 헤센-카셀 공국의 군주 빌헬름 9세가 마이어에게 자신의 재산을 해외에 은닉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마이어는 이 돈의 관리를 셋째 네이선에게 맡겼다. 네이선은 1804년 아예 주 무대를 런던으로 옮겨 은행을 설립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가장 영민한 자식이었던 셋째 아들 네이선 마이어(1777~1836). 영국을 기반으로 채권 거래 등 금융업과 전쟁통의 혼란을 이용한 상품 수출입으로 큰돈을 벌었다. /위키피디아

네이선은 채권 거래를 하면서 정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영국이 유럽 대륙에서 잘 싸우면 영국 국공채 가격이 올랐고, 그렇지 않으면 내렸다. 네이선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세(戰勢) 관련 정보를 빨리 얻기 위해 전용 ‘고속 정보망’을 구축했다.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은 정보 교환에 비둘기를 사용했다. 비둘기는 귀소 본능과 방향감각이 탁월해 시속 70㎞로 곧장 날아가 메시지를 전했다. 훈련된 비둘기는 너비 33.3㎞에 불과한 도버 해협의 경우 30분이면 건널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네이선은 쾌속선 5척과 우편마차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똑똑한 정보원들을 대거 고용해 유럽 각지의 정치, 군사, 통상 정보 등을 수집하게 했다. 그는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전문 연락원까지 양성했고, 환시세와 채권, 증권 등락 등 최신 정보를 빠르게 입수할 수 있었다. 당시 로스차일드 집안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정보를 가져오는 연락원에게 수고비를 듬뿍 주었다. 그래서 로스차일드 집안 전용 파발마는 마부와 마차를 바꾸어 가며 밤새워 달려 남들이 닷새 걸릴 길을 나흘 만에 가곤 했다. 이 하루 차이가 금융에서의 승패를 잔혹하게 갈랐다. 예를 들어 혁명 소식을 하루 먼저 접한 로스차일드는 그 나라 채권을 팔아 치우고 다음 날 소식을 접하고 폭락한 채권을 헐값에 다시 사들여 큰돈을 벌었다. 또 그들은 보안을 위해 중동부 유럽 유대인 언어인 이디시어와 암호를 섞어 사용했다. 로스차일드 집안은 정보가 곧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로스차일드의 ‘정보망과 수송 네트워크’는 오늘날 인터넷만큼이나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1809년 빌헬름은 마이어를 통해 3남 네이선에게 15만 파운드를 보내 만기가 없는 영구 공채인 콘솔채를 사도록 했다. 네이선은 석 달 정도 기다리면 공채를 더 싸게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우선 이 돈으로 무명 천을 사들여 이를 유럽에 밀수로 팔아 40만 파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3개월 후 액면가 100파운드, 이율 3%짜리 콘솔채를 73.5파운드에 사들였다. 이후 네이선은 콘솔채를 73.5파운드 이하에 구매하도록 위탁받았지만 그 금액에 사지 않았다. 영국이 전쟁 자금 확보를 위해 콘솔채 발행을 계속 늘리고 있어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지니 채권 가격은 당연히 내려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네이선은 그 돈으로 밀수 사업과 금에 투자했다. 전쟁 중이라 금값이 꽤 올랐다. 이외에도 정보망을 활용해 얻은 정보를 종합해 시의적절하게 여러 채권을 사고팔았다. 정확한 정보 덕에 단기 투자를 반복하여 66만 파운드를 200만 파운드로 불렸다. 그 뒤 네이선은 빌헬름이 요청한 금액보다 10파운드 이상이나 싼 62파운드에 콘솔채를 사주었다. 네이선은 빌헬름 9세에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고립시키려 했지만, 해군력이 우위였던 영국은 중립국 선박들이 영국 항구를 경유하게 하는 대응으로 봉쇄령을 피해 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때도 밀수로 큰 돈을 벌었다. 오히려 생필품 가격 급등을 겪게 된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반대로 여전히 풍성한 영국인의 식탁을 묘사한 당시의 풍자화. /위키피디아

영국왕 정보망보다 이틀이나 빨라

1815년 3월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돌아오자 온 유럽이 긴장했다. 영국·프로이센 동맹군과 나폴레옹 군은 워털루 전투에 명운을 걸었다. 1815년 6월 18일 결전의 날, 오후까지 전황은 프랑스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오후 4시쯤 프로이센 지원군 3만명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결국 브뤼셀 근교의 워털루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승리했다. 정식 승전 공문은 전쟁이 끝난 뒤 그 결과를 세밀히 조사하여 정확하게 작성한 웰링턴의 부관이 직접 가지고 런던으로 향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집안은 그보다 30시간 전에 먼저 출발한 비둘기와 전용 쾌속선을 이용한 네트워크를 통해 영국 왕실보다 무려 이틀 먼저 이 정보를 입수했다.

네이선은 곧장 증권시장으로 직행했다. 정보통으로 알려진 그에게 전쟁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네이선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단지 그의 눈빛 지시에 따라 네이선의 사람들은 국채를 내다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갖고 있던 국채를 팔기 시작했다. 증권시장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에게 패배했다’는 루머가 돌았다. 증권시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충격과 공포로 국채와 주식 가격은 폭락에 폭락을 거듭해 마감 시간이 가까워오자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다.

네이선의 사람들은 95% 이상 폭락한 채권과 주식을 다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패닉 상태로 이성을 잃은 투자자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나폴레옹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채와 주식은 다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로스차일드는 단 하루 사이에 20배의 차익을 거두었다. 이로써 로스차일드는 영국 채권 총량의 62%를 거머쥐었다. 이때 사람들은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샀다’고 평했다. 그 뒤 네이선은 영란은행 주식의 대부분을 사들여 세계 금융업의 정점에 올랐다. 이때가 본격적인 국제 유대 자본의 태동기이다.

한편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설(說)도 있다. 당시 워털루 전투 직후의 로스차일드 이야기는 나치가 로스차일드를 음해하기 위해 윤색한 일화라는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워털루 전쟁 직후 떼돈을 번 것이 아니라 전쟁 기간 내내 군수 사업과 금괴 밀수 등으로 지속적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약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간 무수한 채권과 환거래를 하면서 한시라도 더 빠른 정보 획득을 위해 모든 정보망 시스템을 가동했었다. 그랬던 네이선이 그 귀한 정보를 48시간 이전에 획득했음에도 이를 활용치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네이선이 증권 객장에서 속임수를 썼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보를 활용해 돈을 번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계속)

정보와 수송의 귀재 네이선

영국-대륙 밀수품 수송작전... 감시 심한 항구 대신 갯벌로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뚫어내

프랑스 해군이 1805년 넬슨에게 완패당하며 영국 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스페인과 나폴리 국왕에,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에 앉히고 자신은 라인동맹을 발족시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려고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의 ‘정보 및 수송 네트워크’가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판로를 잃고 재고가 쌓인 수출 상품 가격이 폭락한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 제품들이 안 들어오자 생필품 가격이 치솟았다. 로스차일드가의 셋째 아들 네이선은 가격이 폭락한 영국 제품을 대량 구입해 밀수루트를 통해 유럽 대륙으로 공수해 떼돈을 벌었다.

그가 선호하는 밀수루트는 덴마크 해안으로, 중간거점은 독일 해안에서 65㎞ 떨어진 영국령 헬골란트 섬이었다. 덴마크 해안은 세계 5대 갯벌로 꼽히는 바덴(아덴) 갯벌로, 배 밑바닥이 뾰족한 유선형 배 ‘첨저선’들은 접안시설이 있는 항구가 없어 접근이 힘들었다. 바덴 갯벌은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3개국에 걸쳐 펼쳐진 큰 갯벌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런 큰 갯벌은 우리 서해안 갯벌과 바덴 갯벌뿐이었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갯벌 해안에 상륙 가능한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을 타고 깜깜한 밤에 밀수품을 날랐다. 밀수를 단속해야 할 당국도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일반 배들은 접근이 불가능한 갯벌을 통해 밀수품이 들어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네이선은 밀수 루트로 금과 화폐도 보냈다. 암암리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상품과 자금의 빠른 수송으로 유명해졌다. 그 뒤 영국군은 네이선에게 군자금 수송을 맡겼다. 대륙봉쇄령 때 금 밀수를 해본 사람이 네이선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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