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 이병주 [김남일의 내 인생의 책 ②]
[경향신문]
지금은 말도 생소해졌지만 ‘대하소설’이 인기를 누리던 시대가 있었다. 짧게는 대여섯 권에서 길게는 스무 권도 넘게, 말 그대로 큰 강물처럼 이야기가 이어지던 소설이다. 박경리의 <토지>는 하도 길어서 완간될 때까지 몇 번이나 출판사가 바뀌었다.
<삼국지>와 무협지를 빼놓고 내가 제일 먼저 읽은 대하소설은 이병주의 <지리산>이었다. 그 무렵 나는 폐결핵에 걸려 휴학 중이었는데, 자다가 가위에 눌려 비명을 지르다 깨어나면 마치 갓 삶은 빨래처럼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그때 우연히 접한 <지리산>이 아니었다면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은 훨씬 더 삭막했으리라. 작품이 실린 월간 ‘세대’의 빠진 호를 찾아서 헌책방 문턱을 수시로 타고 넘었다.
작가는 신문기자 출신다운 간결한 문체로 일제강점기 하동 출신의 두 청년이 걸어가게 되는 상이한 인생의 여로를 추적한다. 앞부분에서는 주인공 이규의 유학 시절이 중심인데, 그가 들어간 학교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다 보니 식민지 청년의 정신적 방황이 외려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뒷부분에서는 그보다 더 뛰어난 수재 박태영의 행로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징병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이후 극도로 혼란한 정국에서 다시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다. 이 점,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나로선 손에 땀을 쥐고 점점 더 깊은 산중으로 내몰리는 빨치산들의 행적을 좇다가도, 문득 누가 지켜보지나 않나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살피곤 했다.
‘링컨의 웃음’(김동길, <대통령의 웃음>)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판금으로 조지던 정권이 어째서 그런 엄청난 사실(史實)을 용납했을까. 나야 모른다. 다만 <지리산>의 작가가 철저히 지식인 주인공들의 사상적 궤적을 좇다가 그들로 하여금 기어이 회한에 차 ‘전향’을 선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은 아닌지, 추측은 가능하다.
김남일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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