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서 첨단기술까지 현실 넘어 이상 실현한 건축가셨죠"

한겨레 2021. 10. 1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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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원정수 인하대 명예교수 영전에

2003년 부인이자 동료인 지순(가운데) 전 교수의 ‘비추미상’ 수상을 축하하던 원정수(오른쪽 둘째) 교수. 맨 왼쪽이 필자 임창복 교수. 사진 간삼건축 제공

30대초 1960년대 목구회 만들어
한국 전후 건축계 발전 기폭제 노릇
80년대는 돌건축 전성시대 열어
“한국은행 본점 길이 남을 역작”
90년대 ‘하이테크 인간화’도 추구
부인 지순 교수와 말년까지 ‘현역’

지난 10일 원정수 인하대 명예교수(간삼건축 고문)께서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부인이자 평생 동료였던 지순 전 연세대 교수(간삼건축 고문)께서 떠나신 지 19일 만에 서둘러 뒤를 따르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더 합니다. 지난달 부인의 빈소에서 휠체어를 타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연이은 영결식에서 돌아와 선생님의 작품집과 함께 대담을 진행하며 찍었던 옛 사진들을 보며 척박했던 건축계에서 종횡무진 열정을 다해 달려오신 선생님의 지난 날들을 회고해 봅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2년 여름이었습니다. 제대하고 2학기 대학원 복학을 앞둔 시점에 실무를 익히려는 생각으로 대한극장 앞 일양건축공방으로 달려가 찾아 갔었지요. 흘러간 50년 세월동안 켜켜이 쌓인 선생님 업적은 점점 더 우리 건축계의 자랑스러운 보석처럼 빛이 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1958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무애건축연구소 등에서 실무를 익히던 선생님은 32살 때인 1965년 4월 1일 목요일 건축설계사무소에서 활동하는 중견건축가들과 함께 목구회를 결성했습니다. 창립회원인 공일곤, 김병현, 김원, 안영배, 유걸, 윤승중, 장종율, 조창걸, 최장운님 등과 함께 1969년 예총 화랑에서, 그뒤 1972년에는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회원작품전을 열었습니다. 1974년에는 <목구회 건축평론집:1965-1974>를 출판하는 등 언제나 앞서서 활동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1960년대 소장파들의 이런 노력은 홍익대 금우회나 한양대 한길회와 같은 건축연구 모임들과도 이어져 한국 현대 건축의 출발점이자 발전의 기폭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1970년대 작업하신 선생님 작품들을 보면 콘크리트로 현대건축을 탐구하신 열정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일양건축 공방에 들어갔을 때 이미 안암동 개인주택, 서울대 학생회관 등을 콘크리트로 디자인했었지요. 선생님의 세종문화회관 현상설계 과정에서 저는 실습생으로 참여해 공간 계획의 묘미와 단면 연구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이 보인 끝없는 탐구 정신과 디자인에서 쉽게 타협하지 않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새로 만든 설계조직 ‘간삼’은 설립 초기부터 다른 국내 대형사무소들과는 다르게 파트너십을 중요한 가치로 두었습니다. 미국처럼 디자인·엔지니어링·마케팅 기능을 잘 갖추어야 한다고 선생님은 늘 강조했습니다. 지순 교수님과 더불어 간삼의 창립 멤버로 정림에 몸담았던 김자호·이광만 그리고 단국대 이범재 교수가 참여하고 오동희·김태집·윤홍노 등이 후속으로 가담하면서 막강한 추진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간삼과 함께 열어간 1980년대는 선생님의 돌건축 전성시대였습니다. 동대문 밖에서 제일 멋있는 건물이라고 칭송되던 ‘한국은행 강릉지점’에서 보여준 석조 아치는 건축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때는 서양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건축의 모티프를 찾아 보려는 노력이 있었지요. 강릉지점에서와 같이 역사성을 함축하면서도 간결하게 한국 건축임을 느끼게 하는 작품은 드물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시각에서 아마도 광복 이후 가장 멋진 석조 고층인 한국은행 본점은 두고두고 한국 건축사에 길이 남을 역작이란 생각입니다. 고층석조건물을 디자인할 때 고려대 본관을 설계한 박동진 선생님을 늘 예로 드시고, 일본에서는 무라노 도고의 돌건축이 압권이라고 말씀하시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불국사 석조 기단에서 모티프를 상상하시고 돌건축은 탑을 만드는 것 같은 경지가 스며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것들도 생각납니다.

1990년대 들어 선생님은 드디어 하이테크 건축에서도 빛을 발하는 새 영역을 개척하셨습니다. 그무렵 우리 상황은 가능한 외국인 건축가를 선임하고 수입자재를 들여와 대형건물을 짓던 시대였지요. 그때 포스코 박태준 회장께서 선생님에게 포스코 본사 설계를 맡겼고, 선생님은 이 기회를 한국적 첨단건물을 개발하는 과제로 생각하시고 ‘하이테크의 인간화’라는 개념을 찾아 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인문학적 상상력에 머물지 않으시고 기술 측면에서도 많은 노력을 하셨죠. 외부 유리벽에 한국산 유리를 사용했고 이를 지지하는 핀조인트(두 부품을 연결하는 핀)도 국산으로 개발하셨어요. 디테일 하나하나를 연구해 가며 인텔리전트 건물로 발전시킨 업적은 기술과 인문 그리고 예술을 통합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외국제 직수입 건물과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 대단한 작품입니다.

고 원정수(앞줄 오른쪽 다섯째) 교수의 2000년 12월 ‘제14회 예총예술문화상’ 수상 때 부인 지순(앞줄 오른쪽 넷째) 교수, 둘째딸 원혜원(앞줄 오른쪽 셋째)씨, 필자 임창복 (맨 왼쪽) 교수 등이 함께 축하했다. 간삼건축 제공

선생님은 언젠가 우리 건축가들이 칠십 넘어 작업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며 “우리 부부가 함께 그렇게 하다 죽으면 참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팔십이 훨씬 넘으신 나이에도 두 분은 언제나 사무실에 나와 제도판 위에서 우리 건축의 미래를 그리셨습니다.

예술의전당 설계자인 고 김석철은 일찍이 지순 선생님과 교수님과의 관계를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는 두 건축가“라는 말로 부러움을 나타내며 ”현실의 소용돌이에서 현실을 넘어선 이상을 실현해 온 우리 시대 건축가로서 선생님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선생님 작품의 역사적 가치를 기록해 두셨지요.

늘 소년과 같은 꿈을 꾸시던 선생님. 이제 지순 선생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임창복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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