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끌려간 뒤 마당에서 태어난 아이..여순사건 73주년, 정부차원 진상규명 첫 발
[경향신문]
“내 이름의 ‘장’자는 ‘마당(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입니다. 외삼촌이 지어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이리저리 피신을 다니다 외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를 낳으셨습니다.”
서장수 여수·순천 10·19사건 여수유족회장(72)은 18일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고 했다. 3남2녀 중 막내였던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던 1950년 7월, 경찰은 아버지를 끌고 갔다. 그렇게 끌려 간 아버지는 인근 경남 남해의 애기섬에서 총살돼 수장됐다.
서씨 가족의 비극은 1948년 10월19일 발생한 여순사건에서 비롯됐다.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 진압명령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켰을 당시 서씨의 아버지는 여수 율촌면 조하마을 ‘구장(지금의 이장)’ 이었다.
여수를 장악한 봉기군들은 서씨를 위협해 이틀 동안 무기고를 지키도록 했다. 이후 여순사건을 진압한 국군은 서씨가 ‘봉기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켜 관리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집단 학살했다. 애기섬 희생자는 120여명에 이른다.
서씨는 “큰 아버지도 여순사건 당시 희생됐다. 지난 3월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어머니는 평생 여순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면서 “늘 ‘남보다 앞장서지 마라’ ‘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버지 같은 삶을 살게 될 지 조마조마 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여순사건은 14연대 봉기군에 의한 우익인사와 경찰 처형, 국군의 진압작전과 협력자 색출·처형 등으로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1949년 10월 당시 전남도발표를 보면 희생자는 1만1131명에 이른다. 이보다 앞선 1949년 1월 중앙정부는 3392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행방불명 82명, 2056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했다.
서씨는 “당시 조사 역시 정확하게 진행된 것이 아니다. 유족들은 제대로 조사하면 피해자가 3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서씨는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한 뒤 유족 일부가 개별적으로 ‘진상규명’을 신청한 게 전부였다”면서 “유족들은 2009년 여수시의 지원으로 진압군이 수백명을 학살한 여수 만성리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다”고 말했다.
유족들의 한은 사건발생 73년만에야 달랠 수 있게 됐다. 지난 7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법에 따라 정부는 내년 1월21일부터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를 설치해 진상조사에 나서게 된다.서씨는 “유족들 평균 나이가 80세를 넘겼다. 고통 속에서 살아오신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진상을 규명할 수 있게 돼 늦었지만 다행이다”면서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가 후세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제73주년 여순사건 합동위령제 및 추념식’은 19일 오전 10시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 광장에서 열린다. 여수와 순천에는 추념식 시작 시간에 맞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 사이렌이 울린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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