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직접민주주의가 필요하다

2021. 10. 1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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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SOCIETY] 부강해진 국가, 불행해진 국민, 우리 시대의 과제

[윤호창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상임이사]
앞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20대 대통령 선거가 5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언론과 지면의 상당 부분이 대선 후보자들에게 할애되고 있다. 권력의 핵심이 청와대에 있는 강한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대통령 1인에게 쏠리는 권력 집중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35년째 계속되고 있는 헌법을 개정하고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지 않는 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많은 언론들이 권력의 향방에 대해 예민한 촉수를 내보이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정신을 진지하고 묻고 날카롭게 질문하는 언론은 드물다.

2022년 시대정신을 생각한다

내년에는 2차례의 선거가 연이어 펼쳐진다. 3월 9일 대선이 끝나자마자 6월 1일에는 제8대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국민에게 선거가 중요한 까닭은 시대정신을 묻고 생각하며, 시대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이를 대리인으로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이 직접 날카롭게 묻고 요구하지 않는다면, 이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찾기는 힘들다. 민주주의는 그 시대 시민들의 정신만큼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G7국가의 반열에 올라설 정도로 지표상으로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단군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롭고, 국가적으로 높은 위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간 2030 청년 세대는 진보적·개혁적 성향의 정당을 지지해 왔지만, 지난 서울과 부산의 시장 보궐선거에서는 청년들의 선택이 달라졌다. 그런 선택을 한 것의 이면에는 고착화되고 있는 '부강해진 국가, 불행해진 국민'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놓여있다.

국가가 부강해져도 국민이 불행해지는 현상이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계속 악화되고 있다. UN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개발해법네트워크(SDSN)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지수가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우리나라의 행복순위는 56위였고, 이후 57위(2018년), 54위(2019년), 61위(2020년), 62위(2021년)를 차지했다. 순위가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체감 행복에 대한 추세적 경향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흐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발표 전 2년간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재인 정부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행복은 대체로 하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표 조사에 사용되는 6가지 항목, ➀ 1인당 국내총생산(GDP), ➁ 건강 기대수명, ➂ 사회적 지원, ➃ 삶의 선택 자유, ➄ 공동체의 나눔(관용), ➅ 부정부패 인식 등에 대한 문제를 우리 사회가 개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불평등과 불균형이 세계에서 손꼽히고 있고, 이런 시장만능과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그 자체가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시민들의 행복감을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치인데, 우리 사회의 정치는 여전히 삼류에 머물고 있다.

현재, 집권여당과 보수야당이 싸우는 것은 조선왕조에서 사림파와 훈고파의 대립을 연상케 한다. 작은 반도에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는 데 목적을 두었지, 제대로 된 민생과 국정을 돌보지 않았기에 식민 지배라는 파국적 결과를 맞고 말았다. 청년들의 눈에도 집권여당과 보수야당 간의 갈등은 사림파와 훈고파의 싸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기에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 듯하다. 지난 시대에 다소 열려 있던 계층이동의 가능성은 거의 막혀버렸고, 조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이 아니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시중의 농담이 이미 진실이 되어버렸다. 이미 심각해졌고 해소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양극화, 기후 위기, 더욱 첨예해진 사회 갈등을 기성의 정치가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의 이중 엘리트 정당 체제

물론 심해지는 양극화는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기는 하다. 자본의 세계화와 가속화되는 기술혁명에 따라 부의 집중 현상은 어느 때보다 심각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에 대한 대처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20년 넘게 세계 최저의 출생률과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인해 유럽 각국에서는 다양한 혁신 세력들이 등장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프랑스의 앙 마르슈(En Marche, 전진)도 여기에 해당한다. 2016년 4월 6일, 프랑스의 마크롱은 프랑스 국민들이 기득권화된 좌우파 정당에 염증을 느끼는 상황에서 전통적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유주의자 정당 앙 마르슈를 창당했다. 이 당은 다음해 중도좌우파 유권자의 대안으로 부상해 압도적 지지로 집권했다. 프랑스는 2017년 대선에서 국회의원 한 명도 보유하지 못한 E. 마크롱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켜 정치권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이권 다툼에 혈안이 되어 있던 기존 정당들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 쇄신을 모색했다.

우리나라의 보수야당에서 국회의원 경력이 부재한 30대의 야당 대표가 선출된 것도 이런 변화 욕구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30대의 야당 대표가 제대로 된 변화와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 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대는 낮아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대다수의 정치권력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시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현재의 대의정치 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근대가 열리고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시작된 이후로 좌파든 우파든 모두 민주주의를 통치 차원에서 이해했다. 우파 정당들은 국민의 대변자와 옹호자를 자처하면서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권위적으로 배분해왔다. 물론 명분은 국민대중 전체의 이익이었지만, 언제나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는 소수 자산 계급의 이익으로 귀결되었다. 이런 사실을 직시한 진보세력들은 좌파 정당을 구성하여 민중을 이끄는 전위이자 옹호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좌파는 대의제도 그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보다는 민중의 근본이익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대의의 주체와 내용이 문제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좌파 세력도 시간이 흐름면서 기득권화되고 우파 기득권과 큰 변별력을 보이지 못했다.

이들을 우리 사회에서 강남좌파라고 불렀듯, 미국에서는 '리무진 진보주의', 영국에는 '샴페인 사회주의', 프랑스에는 '캐비어 좌파'라고 불렀다. 이름은 달랐지만 내용은 같았다. <21세기 자본주의>로 세계 지성의 반열에 오른 피케티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선진국 세계는 고학력의 지적 엘리트(브라만 좌파)와 전통적인 비즈니스 엘리트(상인 우파)라는 두 부류의 엘리트가 양분하는 이중 엘리트 정당 체제로 형성되어 있다. 이를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 또한 2008년의 세계 경제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고착화된 엘리트 지배 체제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통치가 아니라 민치

피케티는 이중 엘리트 정당 체계가 만들어진 데 두 가지의 큰 요인이 작동했다고 분석한다. 하나는 고학력층의 확대와 다양화다. 과거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맞이하면서 전문직 엘리트들이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도 비례해서 커졌다. 다른 하나는 저학력 전통적 산업 노동계급의 몰락이다. 그들은 대규모 사업장을 배경으로 뚜렷한 정체성과 조직력을 자랑하던, 말 그대로 좌파 정당의 핵심 기반이었지만 산업의 해외이전이나 자동화로 인해 다수가 음식점 직원, 운전사, 청소부 등의 하층 서비스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더 이상 좌파 정당의 중심적 지지층으로 기능하기 어렵게 되었다.

전통적 지지층을 상실하면서 좌파 정당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지지층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엘리트 전문직 계층을 만났다. 이후 좌파 정당은 이런 만남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이들은 대체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고학력 화이트칼라 중상층이었다. 좌파 정당은 더 이상 광범위한 중하층 집단을 대변하지 않고, 대신에 고학력의 지적인 엘리트(브라만 좌파)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변모해 갔다는 것이 피케티의 분석이다.

분석은 선명하지만 대안은 흐릿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서 배제되어 있고 정치에 무관심하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권자의 무려 60~70%가 어떠한 정당도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을 찾지 못하는 시민들은 이런저런 포퓰리즘의 유혹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도 여기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시민들이 스스로 새로운 민주주의와 정치 체제를 만들지 않는 한 엘리트들의 과두 체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대의민주주의 하에서는 선거 날 하루만 자유롭다"는 장자크 루소의 냉소처럼,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대의민주주의가 곧 민주주의라는 허구의 등식에서 벗어나서, 직접+숙의+대의+공화주의가 어우러진 융합·창의적인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시민 중심의 새로운 헌법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 가능성은 스위스를 통해 직접민주주의가 얼마나 사회를 활력 있게 만드는 지를 확인할 수 있다. 스위스는 국민소득 8만 달러의 고소득 국가이고, 국가 경쟁력은 초일류 수준이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제의 실행과 경제 성과의 우수성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래서 '스위스가 직접민주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가 스위스를 만든 것'이라는 말이 정치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시민들이 중심이 되는 직접민주주의가 활성화될 때라야 비로소 시민들은 통치의 대상에서 벗어나 민치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통치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민들에게 권력을 양도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민들의 각성된 생각과 조직화된 힘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 이제부터 시작된 정치의 계절에 기성 정치인들의 팬덤 노릇을 하기 보다는 제대로 된 시민이 되기 위해 이웃들과 함께 학습하고, 기성의 질서를 날카롭게 검증·평가하고,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하겠다. 그것이 불행해진 국민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윤호창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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