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품아'가 왜 비싼지 이제야 알겠네
쌍둥이들이 30개월에 접어들면서 예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하나씩 도전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유아차 없이 횡단보도 건너기. 아이들이 혼자서도 잘 걸으니까 유아차 없이 외출을 했다가 횡단보도가 있길래 남편과 호기롭게 도전했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아기 손을 잡고 몇 걸음 걷다가 겁이 덜컥 나서 얼른 아기를 올려 안았다. 집에서는 '이제 꽤 많이 컸군!'하며 흐뭇하게 바라봤던 아기가 횡단보도에 서니 그렇게 작을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군.' 아기가 손을 올려도 운전자에게 보이지 않을 월령이라서 번쩍 안고 건넜다.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넌 후 생각했다. 5년 후의 일이지만, 아기들이 초등학교에 가면 이 횡단보도를 건너게 될 텐데, 횡단보도가 정말 크고 넓구나. 나 혼자 건널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아기들이 8살 어린이가 되어도 이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는 위험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집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거리를 검색해 봤다. 927m. 등굣길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신호등 없는 짧은 횡단보도 하나, 신호등 있는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서 도로 옆 인도를 쭉 따라가면 초등학교 정문이 나왔다.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 단지가 비싼 이유를 몸소 느꼈다. 실제로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단지가 '초품아'인데 같은 평수일 때 우리 아파트 대비 1억 정도 비싸다. 아마 그 1억 안에는 어린이의 보행 안전을 보장하는 '값'도 들어있을 것이다. 어린이의 안전도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것이 못내 씁쓸했다.
'민식이 법'이 악법이라는 사람들, 스쿨존이 무섭다는 사람들, 안전 속도 '5030'을 답답해하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던 적이 있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작다. 잘 안 보일 수밖에 없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약하다. 자동차 범퍼는 어른에게는 무릎 높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얼굴이나 가슴 높이라서 사고가 나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고, 어린이 교통사고는 자동차 바퀴가 사람을 타고 넘는 사례가 많다.(시사인 734호 기사 "어린이 입장에서 진짜 '갑툭튀'는 누구일까")
운전자보다 작고 약한 사람들이 좁은 보폭으로 길을 걷고 있으니까, 조금만 천천히 가자는 것이 그렇게나 분노할 일일까. 초등학생과 고라니를 합쳐서 '초라니'라는 혐오 단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길을 걷는 아이들이 운전자에게 그리도 위협적인 존재인가. 어린이까지 갈 것도 없이 자동차와 보행자가 부딪치면 보행자가 다칠 확률이 훨씬 높은데, 사람 우선의 교통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다가 예전에 봤던 영화 '엑시트'(2019)가 생각났다. 도시에 유독가스 테러가 벌어지자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옥상으로 대피한다. 구조 헬기가 도착하자 주인공 용남과 의주는 부상자, 아이들, 노인을 먼저 태우느라 자신들은 타지 못한다. 유독가스가 계속 올라오고, 이들은 산악 동아리 회원이었던 경험을 살려서 건물 벽에 붙어서 좀 더 높은 다른 건물로 대피한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한 번 구조 헬기를 만나는데, 두 사람의 눈에 옆 건물의 학생들이 들어온다. 보습학원에 학생들이 갇혀서 아우성을 친다. 용남과 의주는 눈물을 머금고 그들에게 헬기를 양보한다. 시종일관 유쾌한 영화에서 유일하게 눈물이 맺혔던 대목이다.
용남과 의주처럼 대단히 정의로운 행동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저 신체 건강한 20대 청년인 용남과 의주가 자신들보다 아주 조금 더 어린 10대 청소년들을 대했던 태도의 일부만이라도 빌려오자. 아이들에겐 안전과 생명이 걸린 일이지만, 운전자들에겐 속도 좀 낮추면 되는 일이다. '초품아'가 아닌 주거지에 사는 아이들에게도 안전한 보행로를 만드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지만, 속도를 낮추는 것은 지금 당장 브레이크만 좀 밟으면 된다. 훨씬 더 쉬운 일이다.
교통 안전의 문제는 비단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 스쿨존이 두렵다고 떠드는 사람들도 늙는다. 언젠가 횡단보도 초록 신호등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노인이 될 것이다. 안전 속도 '5030'은 어린이, 노인, 장애인, 부상 등으로 일시적으로 보행이 불편한 비장애인 모두를 보호한다.
'민식이 법' 때문에 아무 잘못 없이도 감옥 갈 것처럼 떠들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 법이 적용된 판결 25건 중 14건이 집행유예형, 10건이 벌금형이었으며 단 1건에 실형이 선고됐다. 심지어 스쿨존에서 무면허에 과속을 했음에도 징역 1년 6개월에 그쳤다. (시사인 734호 기사 "'민식이법놀이'는 어른들이 하고 있다")
사고 안 당하고 다친 데 없이 자라나 지금 잠시 운전 가능한 신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 어른들, 우리 엄살 그만 떨자.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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