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다

입력 2021. 10. 18. 08:1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③

[김원호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76학번]
5. 애오개

81년에 복학하고 나서, 후배들이 잘 하고 있는 홍탈에는 가끔식 쇠나 치고, 마당극 반주 정도로 놀면서, 맑시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소개로 구로공단 옆에 있는 낙골에서 하는 야학에 교감(책임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지금은 난곡이라는 이름으로 번듯한 도시 면모이지만, 당시에는 가파른 산중턱 꼬방동네였고, 꼭대기에 있는 야학교실에는 노동자 예닐곱에 강학(당시 야학교사 호칭) 예닐곱이 드나들었다. 탈춤반 출신이라고 ’문화‘ 과목을 맡았고, 간혹 풍물을 입장단으로 가르치면서 놀기도 했다. 이 강학팀이 그대로 무궁화섬유 노동자들과 야학을 하였는데, 어느 날 걸려버렸다. 당시 노동야학도 정권이 기를 쓰고 막는, 시국사범 대상이었다. 남산 안기부로 끌려가서 사흘 밤낮을 잠도 못자고 개처럼 얻어맞았다. 희한하게도 우리 모두는 윗선이 누군지 진짜로 몰랐고, 몰라서 몰랐다고 할 수 밖에 없어서 더 터졌는데, 다행히 윗선이 걸리지 않아 시국사건 그림으로 엮어지지 않고 풀려나왔다. 사명감과 비장함은 있었으나 신나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때 얻어맞은 트라우마로 몇 개월 고생하다가 다시 신나기 시작한 곳이 애오개였다.

애오개 소극장은, 전두환 정권 때 겉보기 합법적으로 활동한 문화운동의 기지였다. 이른바 기층민중 속으로 들어가 탈츰운동의 성과를 접목시킨 문화운동 2세대가 공간을 만들었다. 황선진, 김봉준, 연성수 등이 중심이었다. 황선진선배가 좌장이 되어 운영한 이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당시 무명이었던 민속문화의 장인들을 모셔서 세상에 소개했다(박병천의 4인 북놀이 등), ‘청산리 벽폐수야’라는, 놀랍게도 당시에 공해문제를 다룬 환경 음악극이 창작되었고, 김명곤선배와 임명구선배가 만든 ‘장사의 꿈’도 초연되었다. 많은 민중음악들도 창작되어 발표되었다. 지역의 우수한 마당극을 초청하기도 했다(계회도 땅풀이 등). 김봉준 선배가 주도한 미술동인 ‘두렁’이 이 곳에서 창립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붓그림, 목판화 등의 활동을 통해 이른바 무지렁이를 담은 그림을 그리고 배포하면서 미술에 대한 민중문화적인 시각들을 처음으로 정립하는데 애를 썼다.

이런 활동도 중요했지만, 광주항쟁 이후 꽁꽁 묶여 있었던 문화예술인들이 늘 꾀는 사랑방 역할이 컸다. 당시에 모인다는 사실은 무척 행복했다. 막걸리 낭만도 풍성했던, 여차직하면 뛰어가고픈 언더 명소였다. 당연히 사람들이 꾀는 만큼 뭔가가 서로 알게 모르게 이리저리 도모되는 활기찬 시공간이었다. 그 때까지 다소 침울했던 광주항쟁의 아픔이 가셔지고, 또 가셔내는 도모의 기쁨이 충만했다.

무엇보다 애오개의 압권은, 전국의 대학탈춤반 간부들을 교육한 일이었다. 탈춤반 반장과 3,4학년 급들을 모아 3회에 걸쳐 3박4일 정도의 교육 활동을 했다. 이 때 주도적으로 나선 이들이 이른바 ‘76 딴따라’였다. 김영철, 김원호, 정희섭이 각 한 반의 담임을 맡아 이끌었고, 장진영, 표신중 등이 상주하며 열씸열씸 콘텐츠를 만들었다. 전국 각 지역의 성과가 공유되었고, 그 때까지 개발되고 착근된 현장 활동의 제반 성과가 전달되었고, 선배들의 주옥같은 경험담이 이어졌고, 전국적으로 같이 해야 할 일들이 모색되어졌다. 탈춤도 신나게 추었고, 풍물도 익혔다. 이 성과는 무척 컸는데, 이 때 전국에서 모인 탈춤반 후배들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규모 ‘사회적 신명’을 창출하는 근간 세력이 되었다.

애오개는 머지않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연합으로 개편되면서 80년대 문화운동을 불같이 개진하였다.

에피소드 하나. 이 때 처음으로 교주님을 만났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탈춤계에서는 은근히 채희완선배를 교주님이라고 불렀다. 탈춤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좌장이었는데, 우리한테는 반 영웅이었다. 재미삼아 부르기 시작했는데, 탈같이 생긴 채선배님한테는 역설적으로 어울리고 아름다운 호칭이어서 일부러라도, 한 번씩이라도 더 불렀다, 교주님이 주는 그 묘한 불일치의 즐거움은 우리에게, 뭔가 사명감이 먼저 사유되는 것보다는 재미있게 암약한다는 동질성을 주었고, 그게 오히려 근사한 일이 되었다.

당시 교주님은 일타강사였다. 안성 황룡사 등지에서 특강이 벌어지면 비공개 행사임에도 전국의 탈꾼들이 모여들었고, 탈춤과 시대와 할 일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을 우리는 곰씹으며 벅차올랐고 행복해했다.

애오개 시절 나는 교주님한테 봉산 기본무를 다시 배웠다. 무척 빡시게 추었는데 춤사위도 좋았지만 나는 이른바 탈춤정신을 나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시국 관점을 넘어서 근본과 본질에 대한, 탈과 춤과 탈춤의 미학이 처음으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주님께 아직도 감사의 상념이 있는데, 내가 고민 끝에 미술을 접었을 때 내가 그간 해 온 이른바 전위 미술에 대해 잘 정리해 준 일때문이었다. 봉준형은 늘, 엘리트 서구미술 때려치고 민중 속으로 어여 들어와라 해서 속으로는 좀 얄미웠다, 당시의 내 관점으로는 본질 싸움도 안 하고 촌스러운 그림을 그리면서 그런 말을 하니 좀 더 얄미웠다. 나름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내 생애 최고로 집중하는 삶을 살았는데, 갑자기 하찮은 것으로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교주님은 전위라는 것이 나름 얼마나 소중한지를 피력해주셔서 나의 과거(?)가 모조리 부정되지 않는 기쁨을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미학 빙자 삼아 이리 뻥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봉준형은 안 얄밉다. 벌써 45년 묵은 지기인데다가, 형이 민중미술을 고군분투하며 일궈내고, 다양한 내용과 양식으로 변화발전시킨 여러 미술이 이제는 내 감수성에도 무척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모성과 신화적 상상력으로의 진화는 나의 굿미학에도 많은 자양분을 준다. 글고, 여전히 자신은 굿을 한다고 한다. 봉준형이 그 특유의 일관되고 근면한 정성으로 좋은 그림들을 세상에 쉼 없이 날라다 주고 있는 그 깡과 기운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에피소드 둘. 서울 근교 원당에서 언더 마당극이 공연되었는데, 거기 참여하게 되었다. 탈춤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죄다 만날 수 있었던 자리였고, 아, 이들이 애오개의 배후 세력이었구나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재벌들 송년 파티하는 곳을 노동자 둘이 기습 점거하여 그들을 인질 삼아 농성하며 벌어지는 극인데, 팔 짤린 노련한 산재 노동자 역이 김명곤 선배였고, 나는 그냥 혈기만 있는 젊은 노동자 역할을 하였다. 교주님이 연출을 하면서, 해고 쪽지가 붙은 게시판 앞에서 분노를 터뜨리는 연기를 모두에게 시켰는데, 나는 그런 연기를 해야 하는 속내를 몰랐다. 회사에서 안 보는 틈을 타서 스파이처럼 그 해고통지서를 찢어버리는 연기설정을 하였는데, 껄렁껄렁한 건달처럼 한다고 많은 선배들한테서 놀림을 받았다. 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한데 수모를 받는다고 여겨져서, 정말 나에게 맞지도 않고 하기도 싫은 이놈의 마당극을 다시 하나 봐라,라고 억하심정이 들었다. 다행히 쇠파이프 들고 파티장에 난입해서, 재벌들과 동병상련의 무희들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장면은 나도 신나서 하였던 모양인지 그 대목은 잘 했어, 욕이 찰지네하는 칭찬도 들어 잠깐 으쓱해졌지만, 나는 그 후로 마당극을 창작하거나 연출을 주로 했지 연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풍물굿을 하는 입장에서 몇 사람들과 어울려, 당시 애오개에서 ‘팔도 기초가락’을 만들고 퍼뜨렸는데, 이것이 놀랄 정도로 신의 한 수가 되었고, 곧 대박을 쳤다. 기층민중의 자생적 농악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풍물굿으로 광범위하고 급격히 확산되고 당대성을 얻으며 진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탈춤은 마당극 중심으로 전이되며 융성 중이었고, 몇 개 대학이 전승되온 근대농악을 눈여겨보거나 간혹 전수를 하는 정도의 시기였다. 당시 정세로부터 요청되는 풍물의 수요는 나날이 증폭되고 있었다. 애오개에서 전국 대학탈반이 모이는 김에, 농악을 광범위하게 퍼뜨리는 일을 도모하였다. 농악이라는 호칭은 개념상 협소하고 나아가 식민지시대 일제의 조작설도 있어서 파기하였다. 기층문화현장에서 각 지역굿의 특성에 맞게 자부심을 갖고 불렀던 여러 호칭 중에서 두루 쓰였던 ‘풍물’ 용어를 선택해서 사용했고, 나는 나아가 풍물과 같은 근원을 갖는 ‘굿’ 개념까지 붙여 ‘풍물굿’이라는 미학적 개념을 만들고 심화시켜나갔다. 그리고나서 전국의 풍물을 나름대로 재조사해서 공통되고 많이 활용되는 가락 중, 유형과 역할 별로 몇 개를 끄집어내고 편집, 축약시켜서 만든 것이 ‘팔도 기초가락’이었다.

각 가락의 성격을 나타내는 박소(拍素)를 중심으로 간단한 네 가지 유형을 만들었고, 현장에서 사용하는 구음으로 구성하였다.

<이채> 휘모리
/쥔-/쥔-/문여/소-, /문안/열면/갈라/요-/ (두 장단 한 쌍)

<삼채> 자진모리
/땅-도/땅-도/내-땅/이다-/, /조선/땅-도/내-땅/이다-/
/내-땅/이다-/내-땅/이다-/, /백두산/땅-도/내-땅/이다-/ (두 장단 두 쌍)

<길굿(굿거리)> 중중모리
/갱갱-/갱-깨/갠지갠/갱-깨/, /갱-깨/읏깽깽/갠지갠/갱-깨/ (두 장단 한 쌍)

<오방진>
/갱-/갱-/갱갱/읏깽/
/개개갱/개개갱/갱갱/읏갱/
/갠지/갱갱/읏갱/읏갱/
/갠지/갱갱/읏갱/읏갱/ (네 장단 한 쌍)

이채, 삼채, 길굿은 전라도 가락 중심으로 편집해서 만들었고, 당시 신가락이라는 오방진가락은 고대농악대가 사용하는 것을 가져왔다. ‘안팎엮음’이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쌍으로 구성하였고. 배우기 쉽게 쇠와 장구가 일치하는 ‘말뚝장구’로 쇠의 타점과 맞추었다. 당시에 일단 판굿 전체, 나아가 마을굿 전체 기제는 수요가 많지를 않았고, 이른바 문선대로 활용 가치가 높은 요청들이 많아서, 두레농악적인 기제로 신명으로 짓쳐들어가는 힘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아다시피 80년대 민주화운동 전 과정에 풍물이 놓였는데, 대부분은 이 팔도기초가락부터 시작했다. 대학가부터 퍼지더니 그들과 연관된 노동운동 현장, 농민운동 현장의 수요가 폭발하고, 심지어 시민사회에도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열풍이었다. 풍물 없는 80년대의 민주화투쟁을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모든 계층에게 확산되었다.

당시, 근대농악을 텍스트로 삼기에는 이름, 방식, 어법, 타점, 타법, 구성, 연행방식 등이 제각각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배우기에는 난망인데다, 전수받는 시스템도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실어나를지 고민이 컸었다. 그대로 전수받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대부분 판굿 위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신명으로 곧장 짓쳐들어가기에는 번거롭고 많이 무거웠다. 그래서 신명의 증폭 경로가 짧고 명확한 두레풍장적 성격을 우선한 이 팔도기초가락은 당시의 정세에 걸맞은 문화 양식이 되었고, 그 당장의 욕구들을 풍성하게 잘 채워주었다.

87년 투쟁이 조금씩 잦아들면서부터 노동 현장에서는 문선대 역할이 시들어졌으나, 그 투쟁의 정당성과 열기의 기억이 남아있는 시민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풍물굿이 확산되었는데 기본 교재가 대부분 이 팔도기초가락이었다. 그 후 대학가에서 여러 군데의 근대농악을 전수받으면서 풍물굿의 모습은 점차 대회 판굿의 모습으로, 장단점을 가지며, 발전되었다. 이 당시 필봉굿의 역할은 상당했는데, 독특한 마을굿적 성격과 절차기제가 뚜렷하여서, 대학가의 중심 풍물굿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레풍장적 신명 조직에 근간한 팔도기초가락은 자체 심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강습용 기초 가락으로 고착되었다.(4편에서 계속)

▲ 만북울림, 정화수의례 ⓒ김원호

글쓴이 김원호 :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76학번.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김원호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76학번]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