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칼럼] 자기 몫의 숙제

한겨레 2021. 10. 18. 05:0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홍은전 칼럼]영희는 너무 일찍 온 존재여서 가는 곳마다 벽이거나 벼랑이었지만 살아갈 방법도 죽을 방법도 없는 그곳에서 줄곧 맨 앞자리의 막막한 슬픔을 견뎌냈다. 이제 영희는 세상에 없는 방법을 찾아 헤매지 않고 방법을 '만들기' 시작한다. 단체를 만들고 저상버스를 만들고 승강기를 만들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리고 자기의 언어를 만들었다.

홍은전

영희는 열살 때 잠깐 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어느 날 선생님이 학생 한명 한명에게 물었다.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아이들은 저마다 꿈을 말했다. 대통령, 간호사, 교사, 현모양처, 기타 등등. 나는 뭐가 된다고 하지? 영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영희는 소아마비 장애가 있어 걷지 못했다. 티브이에서 본 피아니스트가 떠올랐다. 피아니스트가 된다고 해야지. 그런데 애들이 너 피아노 배웠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영희는 피아노를 본 적도 없었다. 앞으로 배울 거야라고 말할까? 그러는 사이 선생님이 영희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올려다보는 영희의 작은 가슴이 콩콩 뛰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다음에 하자꾸나.”

나는 이 이야기를 올해 환갑이 된 영희에게 들었다. 이야기의 결말은 이랬다. “스무살까지만 살고 죽으려고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스무살 이후엔 살아갈 방법이 없었거든요.”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가 갑자기 경쾌해졌다. “그런데 죽을래도 방법이 없는 거예요. 약을 먹어? 누가 약을 사다 줘? 물에 빠져 죽나? 물까진 어떻게 가지?” 영희가 깔깔 웃었다. 나는 이것이 웃긴 얘긴지 슬픈 얘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방금까지 들려준 유년 시절 이야기엔 명랑하고 우애 깊은 가족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밥상에 둘러앉으면 아버지는 집에서만 지내는 영희를 위해 동생들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도록 했고, 영희는 숙제하기 싫어하는 동생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바느질을 하느라 하루가 짧았다고 했다.

중증장애를 가졌어도 사랑과 지지를 듬뿍 받고 자라면 영희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나 보다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밤마다 울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더라고.” 살아 있는 인간에게 그 이상의 고통이 있냐는 듯이 영희는 벌써 몇번째 그 ‘방법이 없다’는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물었다. “낮엔 동생들의 숙제를 그렇게 열심히 해주던 언니가 밤만 되면 죽고 싶어서 울었다고요?” 나는 영희의 동생도 아니면서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영희가 대답했다. “그건 내 것이 아니잖아요.” 그 말은 뜨겁고도 서늘했다. “나는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존재와 나의 쓸모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오래오래 곱씹다가 나는 알게 되었다. 방법이 없었다고 말하는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는지를. 동생들의 숙제를 하는 것도 어린 영희가 살기 위해 찾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희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동생들이 커서 더 이상 숙제를 받아 오지 않을 때가 되면 자신의 쓸모도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스무살은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자기 몫의 숙제를 받지 못한다면 영희는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몰랐다. 만약 선생님이 영희에게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묻고, “저는 피아니스트가 될 거예요”라고 영희가 대답하고, “아니, 그건 불가능할걸!” 하고 누군가 영희를 무시했다면 나는 그의 슬픔을 더 빨리, 더 선명하게, 그러나 잘못 이해했을 것이다. 영희는 말했다. “나는 낮달 같은 존재였어요. 사람들은 내가 거기 있는 줄도 몰랐죠.”

놀랍게도 영희는 자라서 장애여성단체를 만들었고, 진보 정당의 정치인이 되었으며 중증장애인이 주체가 되는 사회변혁 운동의 대표가 되었다. 영희는 너무 일찍 온 존재여서 가는 곳마다 벽이거나 벼랑이었지만 살아갈 방법도 죽을 방법도 없는 그곳에서 줄곧 맨 앞자리의 막막한 슬픔을 견뎌냈다.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영희는 서른 즈음에 자신에게 아주 소중했던 한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했던 상처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낙인이, 자기로 하여금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도록 계속 추동했다고 대답했다. 나는 가슴이 좀 뭉클했다. 그것은 영희에게 자기 몫의 숙제가 생긴 순간처럼 느껴졌다. 이제 영희는 세상에 없는 방법을 찾아 헤매지 않고 방법을 ‘만들기’ 시작한다. 단체를 만들고 저상버스를 만들고 승강기를 만들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리고 자기의 언어를 만들었다. 어떤 선택은 결실을 맺고 어떤 선택은 그렇지 못했대도 온전히 나쁘기만 한 선택은 없었다. 상처도 좌절도 모두 ‘내 것’이고 시행착오를 겪을 때마다 영희는 고유하고 선명해졌으니까. 영희는 자라서 영희 자신이 되었으니까.

작가, 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