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부터 밤까지 카라마조프.. 완벽한 주말이었다"

박돈규 기자 2021. 10. 1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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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마라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완주기

일요일 오후부터 마음은 출근길처럼 부산하다. 직장이나 일 근심 없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딱 하루, 토요일뿐이다. 낭비나 훼손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토요일에 러닝타임이 6시간에 이르는 연극을 본다고?

지난 16일 오후 2시 서울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 극단 피악이 만든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연출 나진환)은 평일 저녁에 1부 또는 2부(각각 3시간)만 공연하고 주말엔 풀코스로 달리는 마라톤이다. 1부를 보러 온 관객은 168명. 객석 78%가 판매된 것이다. 대학로 연극들과 달리 50~60대 이상 관객이 많이 보였다. 헐렁하고 편안한 옷에 부드러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6시간짜리 연극은 일상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는 장거리 비행이다.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바꾸거나 전원을 껐다. 작가 도스토옙스키 등 1인 5역을 맡은 배우 정동환이 “사형 집행 직전에 감형 명령이 도착해 살아난 저는 그 뒤로 삶이 베푸는 환희를 경험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연극이 시작됐다. 선과 악, 위선과 위악, 천사와 악마 등 인간의 심연을 마주 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소도시의 지주 카라마조프는 탐욕스럽고 방탕한 아버지다. 두 아내와 세 아들을 내팽개쳤고, 백치 여인에게 사생아를 낳기도 했다. 그의 집에 20년 만에 아들들이 나타난다. 첫째 드미트리는 재산 문제를 담판 지으러 왔다가 아버지의 여자에게 반한다. 둘째 이반은 박식하고 신중하며 셋째 알료샤는 말수가 적다.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순 있어도 타인과는 단 3일도 같은 방을 쓸 수 없지” “우리 핏속에 정욕이라는 폭풍우가 있어” 같은 대사가 고요한 몰입을 불렀다.

오후 3시 30분. 10분간 쉬었다. 장거리 연극은 초반이 난코스다. 로비로 나온 관객은 스트레칭을 하며 중반전에 대비했다. 화장실에서는 연극이 준 인상을 굵고 짧게 배설했다. 객석으로 돌아와 다시 80분이 지나자 정동환이 말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1부만 끝났지만 인사는 합니다. 배우들에게도 격려가 됩니다.”

1~2부를 연속 공연한 16일 이해랑예술극장 내부. 객석 78%가 팔렸다. /박돈규 기자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오후 5시부터 90분 쉬는 동안 관객은 장충동 먹자골목 쪽으로 내려가 2부를 위한 연료를 채웠다. 이날 1부를 관람하고 2부는 이튿날 본다는 이모(45)씨는 “짧게 줄여 공연하느라 겉핥기에 그치는 연극이 많은데 이렇게 한 인물을 충분히 길고 깊게 보여주는 연극도 필요하다”며 “2부가 너무 궁금하다”고 했다.

오후 6시 30분. 관객은 다시 오르막을 힘차게 올라왔다. 129명(65% 판매)이 2부를 봤다. 정동환은 20분이 넘는 독백을 소화하며 능란하게 변신했고 이반(한윤춘)이 진흙, 색소, 밀가루, 지푸라기를 뒤집어쓸 땐 연극성이 폭발했다. 아버지가 살해당하는데 누가 범인일까? 법정 장면을 빌려 이 연극은 말한다. 아버지가 얼마나 신성한 이름인지 삶으로 자식에게 증명해야 한다고. “분노와 증오가 당신을 삼키지 않도록 하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하세요. 그리하여 행복을 누리십시오.”

관객은 길게 박수를 쳤다. 시계는 밤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0분짜리 연극을 본 사람들은 바삐 극장을 빠져나가지만 이날 인간답게 살기 위한 투쟁을 본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하루를 다 바쳤는데 10분 일찍 귀가한들 무슨 소용인가. 고교 동창들과 인터넷으로 요점 정리까지 하고 연극을 봤다는 김신덕(69·경기 고양)씨는 “보는 사람도 힘들까 봐 좀 걱정했는데 재미와 감동,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며 “뜨듯한 곰탕 먹고 2부까지 보고 집에 오니 밤 11시가 넘었지만 완벽한 토요일이었다”고 말했다.

속도가 중요한 시대에 6시간짜리 연극은 용기 있는 시도였다. 볼거리가 넘치는 세상에 연극이 무엇으로 경쟁할 수 있는지 증명한 셈이다. 회사원 김태윤(36)씨는 “3권 1700쪽 분량인 소설을 6시간 만에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며 “온전히 생각에 잠길 시공간을 내주는 게 극장의 역할”이라고 했다. 공연은 31일까지.

극단 피악 20주년 기념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선과 악, 위선과 위악, 천사와 악마 등 인간의 심연을 마주 보게 하는 작품이다. /극단 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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