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춘천에서 이봉주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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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세상을 휩쓸기 전까지 매년 10월 넷째 일요일에는 만산홍엽(滿山紅葉)과 푸르른 춘천 의암호를 배경으로 수만 편의 인간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펼쳐졌다. 러너들에게 ‘가을의 전설’로 통하는 춘천마라톤에서는 얼마나 달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폐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견뎌내고 목표 지점을 통과한 모두가 승자다. 오로지 춘천에서만 맛볼 수 있는 청명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얻어낸 성취감은 대체 불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 동안 ‘버추얼 레이스’로 치러지는 ‘가을의 전설’이 춘천을 다시 무대로 할 때 꼭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바로 이봉주(51)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과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제패한 황영조가 일반 마라토너의 범주를 벗어난 큰 폐활량을 앞세운 ‘천재’라면, 동갑내기 이봉주는 평발과 짝발이라는 핸디캡을 훈련과 인내로 극복한 ‘노력파’다. 이봉주는 1996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당시 우승자인 남아공의 조시아 투과니에게 불과 3초 뒤져 은메달에 머물렀을 때 절망과 좌절감을 나타내는 대신 우승자의 손을 잡고 태극기를 흔들며 당당하게 트랙을 돌았다. 금메달 지상주의에 중독되어 있던 국민들이 그때부터 메달 색보다 값진 스포츠맨십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수년 전 고교 동창과 들른 경기도 소재 한 골프장 그늘 집에서 해외 투어에서 뛰다 잠시 귀국한 프로골퍼 양용은과 한자리에 있던 이봉주 일행을 만났다. 한 동창이 모자를 들고 그 테이블에 찾아갔는데, 달랑 양용은 사인만 받아왔다. 한국의 마라톤 영웅이 혹시라도 속상할까 싶어 동창을 다그쳐 이봉주 사인까지 받아오도록 했다. 힐끗 동창을 쳐다 본 이봉주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모자에 사인을 해주곤 그 앞에 세 글자를 달았다. ‘마·라·톤’. 자신을 몰라본, 혹은 무시한 데 대한 소소한 복수였을까. 아니면 마라톤에 더욱 관심을 가져달라는 당부였을까.
이봉주는 은퇴 후에도 달리기를 놓지 않았다. 차 몰고 외출했다가 술자리라도 하게 되면 아예 차를 놔두고 집으로 달려서 돌아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전(前) 메이저리거 김병현은 “바쁜 촬영 일정 속에 곯아떨어지면 늦잠을 자는 게 보통인데, 봉주 형은 단 한 번도 아침 달리기를 거른 적이 없었다. 세계적 마라토너라는 명예가 괜히 따라붙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고 했다. 한국 마라톤은 그가 2000년 도쿄에서 기록한 2시간 7분 20초의 벽을 아직도 깨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봉달이’는 근육긴장이상증이라는 희소병을 앓고 있다. 주로 특정 근육을 자주 쓰는 사람들에게 뇌신경계 이상으로 발생하는 난치병으로, 허리와 목을 똑바로 펼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지난 6월 수술을 받고도 별 차도가 없다고 한다. 이봉주는 지난 8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마라톤도 그렇듯 내 인생에 데드포인트가 온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마라톤에서 데드포인트는 정말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느껴 달리기를 포기하고 싶은 시점을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을 잘 견디면 마치 하늘을 나는 느낌을 갖는 ‘러너스 하이’가 찾아온다.
이봉주는 몸이 완치되면 “30분이라도 제 발로 한번 운동장을 뛰고 싶다”고 했다. 30분이 아니라 1분이라도 좋고, 단 한 걸음이라도 좋다. 학폭·음주·성 추문·금전지상주의가 난무하는 스포츠 판, 사기·거짓·음모를 일삼는 협잡배들이 머리와 허리에 힘주는 정치 판을 보자니 더욱더 보고 싶어진다. 솔직하고 떳떳하게 두 발로 인생 레이스를 펼쳐온 마라톤의 레전드가 가을의 전설을 무대 삼아 내딛는 그 의연한 한 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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