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서글프고 오싹한 온라인 '자아분열'

임명묵 대학원생·'K를 생각한다' 저자 2021. 10. 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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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에 다음 카페 서비스가 개편되면서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는 그야말로 불타올랐다. 진원지는 회원 수 80만을 자랑하여 명실상부 한국 최대 온라인 여초 커뮤니티로 통하는 한 인터넷 카페였다. 이 곳은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답게 원래부터 각종 자료, 유머, 그리고 논란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번에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 사용자들의 이목을 끌게 된 이유는 다소 독특했다. 문제가 된 개편 조치는 글쓴이와 댓글 작성자를 모두 알 수 없는 익명 게시판에서 이루어졌다. 여전히 게시판의 익명성은 유지되지만, 게시판 원래 글의 작성자가 쓴 댓글만큼은 ‘글쓴이가 단 댓글’이라고 표시되게끔 한 것이다.

이 단순한 개편이 몰고 온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수많은 익명 게시판 글에서, 원래 글 작성자가 댓글 창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인 양 전혀 다른 자아를 연기하고 있었다. 이런 황당한 글이 너무 많아서 어지간한 커뮤니티는 이 인터넷 카페의 소위 ‘자아분열’ 글을 돌려보는 내용으로 꽉 찼을 정도다. 자아분열 글의 예시를 조금 들자면 이런 식이다. 다들 어느 대학교에 다니고 있냐고 묻는 글을 올려놓고, 작성자가 댓글로 인하대, 부산대, 동국대에 다닌다며 혼자 여러 댓글을 작성한다든지, 자기를 보육원에 버리고 간 어머니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글에 혼자서 대견하다, 위로받는다는 댓글을 연달아 쓴다든지. 이런 글은 얼핏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던 글이었지만, 댓글에 작성자 여부를 표시하는 간단한 조치만 취하자 순식간에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글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다른 커뮤니티들은 이 상황을 마치 잔치가 벌어진 것처럼 즐겼다. 이 카페에도 가입해 있는 회원이 자아분열 글을 퍼 오면, 어처구니없는 글들을 비웃는 댓글, 그 카페 이용자 수준 전체를 비난하는 댓글 등으로 채워졌다. 개편 몇 주가 지난 지금은, ‘그 카페라면 으레 그럴 것 같다’며 인터넷 공간 어딘가에서 일어난 해프닝 정도로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이런 일인 다역 게시 글을 쓰는 동기는 무엇일까? 아마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관심과 공감, 이해를 구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이 여러 건 달린 게시 글은 타인의 관심을 더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첫 댓글 분위기에 따라 전체 댓글 창의 여론이 큰 영향을 받는 커뮤니티 특성상,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얻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듣고 싶은 내용의 댓글을 자신이 직접 작성하는 일이었을 테다. 전날 친구와 있었던 일, 일터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하며 공감받고 싶었을 것이고, 때로는 아예 없는 사연을 만들어내서라도 시선을 끌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이 ‘자아분열’ 대란은 웃기기보다는 서글픈 이야기로도 들린다. 인터넷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이유에서든 깊은 상처를 받은 이들이, 그 상처를 나눌 사람도 얼마 없어 온라인 커뮤니티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그 온라인에서도 무슨 말이라도 털어놓고 싶고 남들의 관심을 받고는 싶은데, 또 상처받기는 두려워서, 마치 연기하듯 계속 댓글을 썼다는 뜻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들에게 대체 세상은 어떤 곳이었고 그 커뮤니티는 그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이것은 서글픈 이야기임과 동시에 오싹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뎌진 가운데 사회를 적대적이고 음울한 곳으로 인식하게 유도하는 게시 글과, 없는 사실을 지어내어 자신을 과시하는 게시 글들이 근거 없는 자작극을 통해서 크게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시 글을 보는 것이 건전한 사회관과 개인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리는 만무하다.

최근 미디어 기술의 발전에 따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지는 ‘메타버스’ 세상이 온다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이번 논란은 우리가 ‘이미’ 메타버스를 살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메타버스 세상은 장밋빛 기회보다는 2021년 현재의 음울한 그림자를 더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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