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김정수 시인 2021. 10.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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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착하다 사람 좋다

그기 다 욕인기라

사람 알로 보고 하는 말인 기라

겉으로는 사람 좋다 착하다 하믄서

속으로는 저 축구(芻狗) 저 등신 그러는 기다

우리 강생이 등신이 뭔 줄 아나

제사 때 쓰고 버리는 짚강생이가 바로 등신인 기라

사람 축에도 못 끼고 귀신 축에도 못 끼는

니 할배가 그런 등신이었니라

천하제일로 착한 등신이었니라

세상에 두억시니가 천지삐까린데

지 혼자 착하믄 뭐하노

니는 그리 물러 터지면 안 되니라

사람 구실을 하려믄 자고로 모질고 독해야 하니라

길게 말할 게 뭐 있노

우리 강생이 그저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되니라

하모 그라믄 되니라!

박제영(1966~)

“전국 방방곡곡 안 댕긴 장이 없”(‘아라리’)다는 시인의 할머니는 술만 자시면 손자를 옆에 앉히고 신세타령이다. 백여시 같은 여자에게 빠져 바람을 피운 남편이 어린 색시와 세 살배기 딸만 남겨놓고 죽은 것을 시작으로 보릿고개를 못 넘기고 죽은 아재를 져다 묻은 이야기, 집도 없이 장돌뱅이로 떠돌던 이야기…. 눈물 흘리는 손자를 달래가며 풀어놓는 할머니의 장탄식은 끝날 줄 모른다. 열무김치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 다 비우고서야 할머니는 잠이 든다.

시인은 살아생전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셨다는 ‘축구 등신’이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추구(芻狗·짚강아지)라는 걸 대학에 가서야 알았다고 한다. 등신은 나무나 돌, 쇠, 흙 등으로 사람의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놓은 신상(神像)인데, 지금은 ‘바보’라는 의미로 변했다. 추구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착하다 사람 좋다”는 말은 욕이라며 “모질고 독”하게 살라 당부한다.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된다는 것. 시인은 지금 할머니의 당부대로 살고 있을까.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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