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와 우연이 만난 회화, 이건용 작가

서울문화사 2021. 10. 1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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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도 따라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있다. 신체가 허용하는 만큼 팔을 뻗어서 그어진 선은 작가의 의도와 우연이 만난 현상이라도 말하는 이건용 작가. 그는 회화를 새롭게 정의한다.



작업실을 겸한 이건용 작가의 자택. 거실 한가운데에는 화면을 보지 않고 등지고 서서 사방으로 선을 그으며 작가의 신체 부분만 여백으로 남은 ‘bodyscape’ 연작이 전시되어 있다.


캔버스에 흐른 물감의 흔적이 인상적인 ‘bodyscape’ 연작.

“화면을 보고 그리는 것이 정상인데, 저는 캔버스 뒤에서 손을 뻗어 그리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몸으로 선을 긋는다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자, 내 키만 한 캔버스를 놓고 그 뒤에서 선을 긋고 있어요. 지금 내가 선을 그으면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어떤 선이구나 알 수 있지만, 나는 알 수 없어요. 나는 화면 뒤에서 긋기 때문에 어떤 선이 그어졌는지 알 수가 없지요. 내 팔이, 내 몸이 캔버스와 만나서 선을 긋는 거죠. 이것을 누가 못하겠어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어린애도, 어른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할 수 있어요. 내 예술은 누구하고도 소통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에요.”

캔버스 뒤에 선 이건용 작가가 붓질을 하며 작품을 설명한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붓을 든 팔의 길이만큼 물감 선이 그어진다. 작가의 구수하고도 재미있는 설명을 듣다 보면 “모든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위대한 예술가는 어디서든 나올 수 있다”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한국 실험미술의 거장’인 그는 화면을 눈으로 마주하고 머리의 생각을 손으로 옮겨 그리는 전통적 회화 제작 방식을 전복하고 ‘그리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며 독창적 작품세계를 추구해왔다.

‘논리’라는 그만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그리는 사람의 ‘신체’와 작품이 전시되는 ‘장소’,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이건용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3가지 키워드였고, 파격적인 작품 활동으로 작가는 1973년 제8회 파리 국제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은 초기부터 작업해온 ‘bodyscape’ 연작으로 작가의 신체가 남긴 유연하고도 격렬한 몸짓의 흔적을 보여준다. 어느덧 작가는 팔순을 넘긴 노장이 되었지만 작품 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최근 개인전으로 대중과 소통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의 작업 공간을 마크 테토가 방문했다.

방 하나에 큰 캔버스를 설치하고 ‘bodyscape’의 선긋기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이건용 작가.


화면을 보고 그리는 것이 정상인데, 저는 캔버스 뒤에서 손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몸으로 선을 긋는다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자, 내 키만 한 캔버스를 놓고 그 뒤에서 선을 긋고 있어요. 지금 내가 선을 그으면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어떤 선이구나 알 수 있지만, 나는 알 수 없어요.


방 안과 밖에서 어우러진 작품과 재료들.

M 작가님 안녕하세요! 평소 작가님의 작품을 좋아하고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게 돼 영광이에요. 저는 미술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국의 예술을 사랑하는 외국인의 시선으로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요. 작업실까지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나도 전문가의 질문보다 평범하고 일반적인 질문을 환영한답니다. 예전부터 어린이처럼 저에 대한 정보가 없고, 순수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거든요. 어떤 질문이든 좋아요.

M 저는 작가님이 한국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하신다고 생각해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그런 작품이에요. 어떻게 자기만의 길을 걷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어른하고 대화할 때면 “왜요?”를 입에 달고 살던 아이였고, 어떤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리는 문화에 대해서도 반감이 있었어요. 그림이 뭐길래, 꼭 어떤 형태를 일치하게 그리는 게 좋은 걸까라는 의문이 늘 있었고요. 그런데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에 책이 정말 많았는데,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철학책을 읽기 시작하게 됐고, 그때부터 나만의 세계관이 확립되었죠.

M 굉장히 어린 나이에 철학을 접하게 되었네요? 학교 공부보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면서 배웠어요. 중학생이었지만 궁금한 건 못 참아서 대학교에서 열리는 학회도 찾아가고, 프랑스 문화원, 독일 문화원을 돌아다니면서 서양철학과 문화를 습득했죠.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는 후배들을 모아놓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미술에 대해 설명하면서 잭슨 폴락이나 마크 토비 등을 거론하기도 했죠. 학교 미술 선생님이 놀라실 정도였어요(웃음). 관심이 있다면 내가 연구하는 것이지 누가 나를 교육시켜서 그 시스템에 들어가는 걸 거부했어요.

이건용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신체와 평면과 재료가 만나 탄생한 결과라고 말한다.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오랫동안 집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그 시기에 씹은 껌들을 모아 평면에 붙여놓은 것.


집 안 곳곳에 진열해둔 작가의 옛 사진과 작품들.

M 말씀을 들으니까 철학을 전공했을 것 같은데, 미술가가 되셨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그림 그리기였어요. 방과 후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느라 매일 늦게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께 혼이 많이 났죠. 간호사셨던 어머니는 제가 의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요. 의과대학에 갈 실력도 안 됐지만요. 집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낮에 돈 벌고 밤에 미술을 공부하겠다고 야간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하고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께서 그토록 미대를 가고 싶다면 홍익대학교에도 지원해보라고 하셔서, 당시 2차였던 홍익대 입학 시험을 치렀어요. 실기 시험이 아폴로 석고 데생이었는데 다른 지원자들이 모두 앞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앉는 바람에 나는 앉을 곳이 없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아폴로의 뒤통수를 그리고 있는데 당시 시험 감독이셨던 김환기 선생님이 지나가면서 왜 뒤통수를 그리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사실대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 “홍대가 제일 좋은 학교이니까 좀 튀게 그려서 합격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합격했어요(웃음).

M 틀에 갇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는데, 학교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미술 학회를 조직해서 맨날 토론하는 게 일이었어요(웃음). 당시에 제가 푹 빠져 있던 철학자가 메를로 퐁티였는데, 세계는 신체의 기지로 이루어졌다는 그의 논리가 저를 사로잡았어요. 몸은 의식의 외부 대상이 아니라, 몸을 통해 비로소 외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거죠. 또 사물과 나의 관계, 내가 보는 방식, 그리고 외부에 내가 비춰지는 것들에 의해 총체적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요. 그런 세계관에 푹 빠져서 매일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미술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찾으려고 했죠. 회화의 틀을 벗어나려고 했어요(웃음).

M ‘bodyscape’ 같은 작가님의 작품들은 그런 철학에 기반해서 나온 거군요? 전 미술 행위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묻다보니, 신체를 움직이면서 거기에 물감이라든가 매체가 동원되고 그다음에 평면에 첨가되어 흘러내리고 칠해지면서 톤을 만드는 그런 현상. 그런 어떤 행위의 현상이 회화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회화라는 것이 어떤 ‘쟁이’처럼 기술을 부려서 생겨나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는 사람의 신체를 움직이고 매체를 평면에 써서 나타나지는 현상이 바로 회화라고 믿어요.

대형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박스들을 모아서 자르고 쌓아두었다.


작업실 바닥에 잘 정리되어 있는 붓과 물감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이건용 작가의 개인전 <Bodyscape> 전경. 10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신작 회화작품과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이건용 작가의 개인전 <Bodyscape> 전경. 10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신작 회화작품과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이건용 작가의 흥미로운 철학과 아름다운 결과물에 매료되었다는 마크 테토.


한쪽 팔을 이용해 큰 원을 그려놓은 작품 앞에서 드로잉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작가.

M 제가 이제까지 생각하던 회화의 개념과는 정말 다르네요. 평범한 사람들은 벽에 걸린 작품을 보고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하는데 작가님은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죠. 하나의 선은 타당한 요소에 의해서 탄생되고 그어지는 거죠. 내 안에서 개념적으로 생각해서 그어진 게 아니라, 바깥에서 내 몸이 그렸기 때문에 내 안에서 선이라고 인식하는 거예요. 미술계에도 저와 비슷한 생각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새로운 조류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물감을 뿌리고 넓적한 나이프로 쭉쭉 밀어서 작품을 완성하거나, 물감 통에 구멍을 뚫고 천장에 추처럼 매달고 돌려서 뿌려지는 문양이 작품이 되죠. 실제적인 행동과 현상을 보여주면서 관객과 소통하는 거예요.

M 어떤 의도 없이 만들어졌는데, 작품들이 갖고 있는 색이나 문양이 모두 멋있는 것도 흥미로워요. 제 몸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우연이 만들어낸 작품이죠. 저기 보이는 하트 모양의 작품은 화면 옆에 서서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남긴 둥근 선인데, 사실 저는 오랫동안 그게 하트 모양인 줄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그걸 하트 모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화면을 바라보고 서서 양손으로 위아래로 선을 그은 작품은 제가 그림을 그릴 때 천사가 와서 놀다가 날개만 두고 갔다고 하고요(웃음).

M 작가님이 사용하신 색과 신체의 활동이 조화를 이루어서 이렇게 멋진 작품들이 탄생했다는 게 정말 재미있네요. 그 과정이 흥미로워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져요.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작품들도 모두 인상적이에요. 오늘 인터뷰를 통해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더 잘 알게 돼서 기뻐요. 특히 하트 모양의 작품이 너무 좋아졌어요. 오늘 즐거운 대화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고마워요. 제 그림은 어린이나 노인이나 모두 이해하고 그릴 수 있고, 모두와 소통할 수 있어요. 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도 그릴 수 있죠. 아마 그때의 근력과 기운으로 그릴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해서 계속 그리고 있을 거예요(웃음).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이건용 작가의 개인전 <Bodyscape> 전경. 10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신작 회화작품과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마크 테토(Mark Tetto)

마크 테토(Mark Tetto)

JTBC 〈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생활 11년 차, 북촌의 한옥 마을에 거주하며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매일 누리고 있다. 경복궁 명예 수문장을 역임하고, 한국 공예품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중 한 명. 매달 〈리빙센스〉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기획 : 심효진 기자  |   사진 : 김덕창  |   취재협조 : 갤러리현대(@galleryhyund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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