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41] 크레이지 배가본드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 10. 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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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담배를 빤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물을 마신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 꽁초 토막…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일러스트=김성규

나는 그에 대해 애증이 있다. 이 시인은 시를 잘 쓰고픈 욕심도 없었던 걸까. 다른 욕심, 돈이라든가 집이라든가 사랑 따위 세속적 욕심은 없어도 시인이라면 시에 대한 욕심은 있었을 텐데, 그의 어떤 시들은 너무 쉽게 쓰인 듯 보인다.

‘크레이지 배가본드’는 천상병의 시치고는 어렵고 세련되었다. 오늘, 내일의 바람을 맞는 사람. 시시한 하루를 보낸 뒤 담배를 빨고 물을 마신다. 물을 마신 뒤에 돌아보니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에서 바다를 상상한, 지극히 정상적인 시인이 천상병이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대구도 훌륭하다.

미친 방랑자라는 영어 제목도 절묘하다. 제목을 ‘미친 방랑자’라 했다면 시의 맛이 살지 않았으리라. 그는 정말 크레이지? 크레이지 배가본드였을까. 그를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시를 읽으니 그를 알 것 같다. 이렇게 살다 갈 수밖에 없는 내가 그렇게 살다 갈 수밖에 없었던 그를…. 그의 시집을 읽으며 몇 번이나 깔깔 웃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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