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가을 한파
[경향신문]
가을은 언제, 어디서 오는 걸까. 극작가 차범석(1924~2006)은 이렇게 노래했다. “가을은 하늘에서 온다. 높푸른 하늘에서 가을을 본다. 가을은 바람을 타고 온다. 반소매 옷자락에 스며드는 썰렁한 촉감에 가을이 눈을 뜬다….” 봄이 상쾌한 아침이라면 가을은 차분한 저녁이다. 무더운 여름 한낮을 뒤로하고 추운 겨울 한밤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너른 들판이 노랗게 익어가고 온 산이 단풍으로 붉게 물드니 넉넉하고 아름답다. 온 가족이 한데 모여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는 저녁 밥상 같다. 그러다 해 떨어지듯 낙엽들이 떨어지면, 가을은 쓸쓸하고 적막한 사색의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기도 하다.
춥다. 반소매에 스며드는 썰렁한 촉감을 느끼자마자 갑자기 추워졌다. 어제 분명 반소매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패딩을 입어야 했다. 전날에 이어 전국적으로 이례적인 10월의 한파특보가 내려진 17일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은 1.3도, 1957년 10월19일(영하 0.4도) 이후 64년 만에 10월 중순 기준으로 가장 낮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첫얼음도 관측됐는데 예년보다 17일이나 빨랐다. 가을을 건너뛰고 여름에서 겨울로 직행한 듯하다.
올해 더위가 추석연휴 지나 10월 중순까지 가시지 않고 모기도 기승을 부려 ‘가을 실종’이라는 말이 나돌았는데 곧바로 한파가 닥치면서 더 실감나게 됐다. 기상청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사계절 중 가장 짧은 것이 가을이다. 지난 10년을 보면 가을은 평균적으로 9월29일부터 12월1일까지 64일간이었다.
북극에서 내려온 한기가 원인인 이번 한파는 19~21일에 다시 한 번 엄습하고, 24일쯤에야 예년 기온을 회복할 것으로 기상청은 내다봤다. 완연한 가을날은 그 이후부터 한 달 남짓뿐일지도 모르겠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예전에는 가을-봄-여름-겨울 순이었다가 2019년부터 봄-가을-겨울-여름 순으로 바뀌었다. 가을이 갈수록 짧아지면서 가을의 정취가 잊혀진 게 아닌가 싶어 살짝 서운해진다. 누구나 시인이 되고, 편지를 써내려가고 싶어지는 낭만의 가을날이 이렇게 사라지고 있다. 자연이든, 인생이든 가을은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인데도 그렇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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