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의 강화일기] 팬데믹 속 유럽 사인회

한겨레 2021. 10. 17. 18: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금숙의 강화일기]

김금숙ㅣ그래픽노블 작가

유럽은 3년 만이다. 9월9일 아침 7시까지 모이기로 했다. 공항까지는 차가 밀렸다. 나는 8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한-벨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벨기에 만화박물관에서 한국만화전이 열리고 있다. 공항에는 행사에 참여할 강도하, 박재동, 김용철 작가와 전시 책임자들이 이미 와 있었다. 안동에서 장승 깎기로 유명한 김종흥, 류필기 선생은 몇시간 못 자고 운전해서 왔단다. 공항 제1터미널은 텅 비어 있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미래에는 더 빨리 더 자유롭게 더 저렴하게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코로나19로 외국 여행은 30년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해마다 이맘때 만화축제가 열린다. 3일 동안 전시, 사인회, 콘퍼런스, 게임, 아틀리에가 집중적으로 행해진다. 올해는 9월10일부터 10월10일까지 여러 장소로 분산되었다. 한국만화전이 열리고 있는 벨기에 만화센터는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가 1906년에 설립한 아르누보의 대표적 건물이다. 초기에는 직물 백화점이었다. 곡선의 건축물이 부드럽고 장식적이다. 오래된 돌과 나무를 손으로 천천히 만졌다. 숨통이 트였다. 내가 사는 땅은 자고 일어나면 새 건물이 솟아 있다. 어쩌지 못해 모른 척 살자 해도 그게 잘 안된다.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멜라니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가 나에게 전시가 마음에 드느냐 물었다. 전시 준비 기간이 짧아서 애를 먹었단다. 어떤 작가 작품은 매주 다른 원화로 교체해 방문객이 올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멋진 아이디어라고 말해주었다.

박물관 책방에서 사인회를 열었다. 진열대에는 지난 1년간 프랑스어권 나라에서 출간된 내 만화책이 쌓여 있었다. 저 많은 책을 다 팔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책에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있거나 한국에 다녀왔거나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자녀를 둔 이도 있었다. 청소년보다는 어른 독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첫 책부터 꾸준히 읽어온 독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프랑스에서 출간된 <기다림>과 <풀>을 사서 내밀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란 표지의 책이 쑥 들어왔다. <준이 오빠>였다. 뜻밖이었다.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 옆에 엄마로 보이는 이가 말했다. “인사하고, 사인해주세요, 해야지.” 내가 책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청년의 엄마는 이 책을 쓰고 그려 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아들에게는 자폐증이 있다. 주위 사람들이 이들의 삶에 콩 놔라 팥 놔라 줄곧 간섭했단다. 이래라저래라 계속되는 참견과 충고에 시달렸단다. 남의 삶에 훈계하고 뒷말하기 좋아하는 것은 국경이 없나 보다. 청년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사인이 된 책을 가지고 자꾸 다른 쪽으로 가자 엄마가 그를 불렀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준이 오빠>의 최준과 그의 가족이 떠올랐다. 강화도 이웃인 <큰나무 카페> 청년들과 부모들도 생각났다. 마을에서 인사를 제일 잘하는 상일이, 아무리 어려운 곱셈이어도 바로 계산해내는 두현이, 종이를 보물처럼 다루는 영주. 모두 잘 있겠지?

벨기에에서 행사를 마친 일행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프랑스에서 사인회와 대담회가 있어 홀로 파리로 이동했다. 파리, 스트라스부르, 낭시 일정이 남아 있었다. 파리에서는 젊은 독자들을 꽤 만났다. 그들은 한국전쟁에 대하여 거의 몰랐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았단다. 내가 그린 그래픽노블로 읽고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교과서에 실린 역사는 드러내고 싶은 것만 넣었다고 비판했다.

팬데믹 덕에 돈을 번 이도 있다. 망가(일본 만화 또는 일본식 만화)를 출간한 출판사와 만화 전문 책방이다. 사인회를 열었던 서점 점장들에게서 들었다. 그중 한명은 만화 전문 책방을 연 지 10년 만에 처음 돈을 벌었단다. 정부에서 18살 학생들에게 300유로를 문화생활에 쓰라고 지원해주었단다. 학생들 대부분은 그 돈을 망가 사는 데 썼다. 판매된 만화책 2권 중 한권이 망가였단다. 지원금 중 몇 퍼센트는 첫 작품을 낸 작가의 책 구입이나 조금 덜 ‘상업적'인 그래픽노블을 사는 데 쓰였어도 좋았겠다.

작품과 돈에 대해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많은 작품 제안을 거절했다. 계약금과 조건도 좋았다. 거절하자마자 내가 미쳤지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도 결심을 돌이키진 않았다.

한국 입국하며 자가격리 안전보호 앱을 깐다. 2주 만에 강화도의 논이 노래졌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