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공소권 남용이 인정되었다

한겨레 2021. 10. 1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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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류영재ㅣ대구지방법원 판사

유우성은 2004년 탈북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2010년 검찰은 유우성을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수사한 뒤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2013년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유우성을 간첩으로 보아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했다. 이 사건에서 국정원은 유우성의 동생을 국정원 산하 합신센터에 수개월간 독방 구금하면서 불법수사했고, 유우성이 북한에 출입했다는 내용의 중국 공문서를 위조해서 검사에게 건넸으며, 검사는 위조된 공문서를 재판에 증거로 제출했다. 위조 사실은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고, 유우성의 간첩 혐의는 무죄로 판단되었다. 2014년 5월 초 공판 관여 검사들이 징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8일 뒤인 5월9일 검찰은 유우성에 대해 2010년 기소유예 처분을 했던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다시 기소했다. 사죄는 없었다.

모든 재판이 어렵지만 형사재판은 특히 더 어렵다. 강한 공권력, 즉 수사권과 기소권이 행사되기에 사법은 피고인, 피해자, 변호인, 참고인 등 참여자들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공권력을 통제해야 한다. 동시에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 형사사법적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재판 환경(법관 수 부족, 많은 재판, 신속한 처리)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멘붕’이다. 많은 사건들을 빠르게 다루면서 충실한 재판도 하라니.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의구심이 드는 순간 우선순위를 정하고 취사선택을 하게 된다. 절차는 포기하더라도 실체는 건지자. 공권력 통제가 웬 말이냐. ‘실수 누락 없고 최신 대법원 판결을 제대로 반영하는 재판’만 잘해도 감지덕지다. 문제는 이 생각이 틀린데다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절차적 정의와 실체적 진실은 항상 독립되어 존재하는 관계가 아니다. 판결에 드러난 사실은 실체적 진실 그 자체가 아니다. 수사를 거쳐 재판에서 현출된 주장 및 증거들을 대상으로 판사가 재구성한 사실이다. 주장 및 증거의 형성 과정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재판에서 인정되는 사실이 실체적 진실에 최대한 부합하기 위해서는 주장 및 증거 형성 절차가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고문을 통해 진실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고문 때문에 거짓을 말한 예도 수없이 많다. 전자의 가능성을 위해 후자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한편, 실체적 진실에 부합한다고 곧바로 형사사법적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다. 공권력은 시민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 그럴 권한이 없다. 범죄임이 확실하다고 해도 검경이 자의적으로 수사하고 기소하는 것을 허용해선 안 된다. 공권력의 행사가 통제되지 않으면 시민은 지배받게 된다.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 위반이다.

따라서 형사재판은 절차적 정의와 실체적 진실이 충돌하는 공간이 아니라 절차적 정의가 준수된 상태에서 최대한 실체적 진실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수사권과 공소권은 적법하게 행사되어야 하고 사법은 이를 통제해야 한다. 그런데 실천이 너무 어렵다.

특히 검찰의 공소권 행사는 매우 통제하기 어렵다. 1990년대부터 하급심에서 공소권 남용을 인정하는 판결이 간혹 시도되었다. 대법원은 공소권 남용 가능성을 긍정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학계도 기소독점주의와 기소편의주의를 근거로 검찰의 기소재량을 폭넓게 해석했다. 공소권 남용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법문도 외국처럼 사전심사하는 제도도 없다. 유죄임에도 공소권 남용을 이유로 처벌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유무죄를 판단해야 할 사건들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나는 직무를 일부 포기했다.

2016년 서울고등법원은 검찰의 유우성에 대한 외국환거래법 위반죄 기소에 대해 공소권 남용을 이유로 공소기각 판결을 선고했다. 검찰이 2010년 기소유예 처분을 한 이후로 유의미한 사정변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 다시 기소한 것은 의도적이고 자의적인 공소권 행사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2021년 10월14일 이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인정한 최초의 공소권 남용 사례다. 다만, 검찰이 공소권을 남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간 법원의 적절한 통제가 부재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며 수사권 및 공소권에 대한 사법통제에 소극적이었던 나 같은 판사 때문에 검찰은 유우성을 재기소할 수 있었다. 그 공소권 남용은 다른 하급심에서 통제했다. 대법원 판결까지 이끌어냈다. 다행이고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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