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살인범에 복수하려 몸에 그 이름 문신 새겼습니다".. '메멘토' 영화 리뷰 [씨네프레소]
박창영 2021. 10. 16. 19:03
*주의 : 이 기사에는 반전 영화 '메멘토'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⑥ 영화 '메멘토' 리뷰
지금처럼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하기 전 손바닥은 좋은 메모장이었다. 당장 뭔가를 써야 하는데 노트가 없을 때, 사람들은 제 몸에 볼펜을 꾹꾹 눌러 기록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심부름, 오늘 장 볼 때 꼭 사야 할 물품 등이 살갗 위에 적혔다. 실제 노트와 달리 분실 위험이 없는 데다가, 사람은 자기 몸을 자주 들여다보기 때문에 유용한 기억법이었다.
'메멘토'(2000) 주인공 레너드 쉘비(가이 피어스)도 본인 몸을 노트로 활용하는 인물이다. 땀에 번지는 볼펜과 달리 웬만해선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 기록한다. 그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건 아내를 강간·살해한 범인이다. 중요한 정보를 신체 곳곳에 새겨 복수를 준비한다. 물론 실제 메모장도 이용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바로 되새겨야 하는 범인의 이름과 중요 정보는 모두 몸 위에 쓰여 있다. 완벽한 복수를 위한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을까.
10분마다 사라지는 기억, 완벽한 복수 위한 철저하고 처절한 메모
레너드가 문신이라는 극단적 기억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려서다. 아내가 '존 G'라는 범인에게 살해당한 뒤 충격을 받은 그는 새로운 기억을 10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사건 전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이후의 것은 쌓이지 않는다. 달리는 도중에 본인이 누군가를 쫓는 중인지 상대방에게 쫓기는 중인지 깜빡할 정도로 심각하다.
기억이 10분마다 자동으로 삭제되기 때문에 그는 절박하게 적는다. 간단한 정보는 메모장에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다. 범인의 이름을 비롯한 주요 단서는 절대 잊어선 안 되기 때문에 몸에 기록한다. 과거 보험 조사관일 때부터 '기억은 기록이 아닌 해석이기에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 그는 철저하게 적는다.
다행히 주변엔 그를 돕는 사람들이 있다. 10분마다 기억을 잃는 레너드가 몇 번째 던진 질문일 텐데도 웃는 얼굴로 대답해주는 테디(조 판톨리아노)가 그렇다. 잠복 형사라는 그는 10분 단위로 기억이 끊기는 레너드가 연속성을 가지고 범인을 쫓는 것을 보조한다. 애인을 잃은 슬픔에 레너드를 도와주는 나탈리도 있다. 레너드의 기억상실증을 악용해 모텔 방을 두 개나 빌려주는 악질들도 있지만, 선의를 가지고 레너드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복수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처럼 느껴진다.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다면 이 단락은 건너뛰세요) 복수심은 누군가에겐 이용 가치가 있다
'메멘토'는 컬러·흑백 시퀀스가 교차되며 퍼즐처럼 진행된다. 영화에서 다루는 시간이 A(과거)에서 Z(최근)까지라면 컬러 부분은 Z에서 10분 단위로 쪼개져 A를 향해가며 흑백 장면은 A에서 Z로 향해간다. 컬러가 범인을 찾아가는 긴박한 추격전을 담는다면, 흑백은 방안에서 레너드가 누군가와 통화하며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는 일종의 스토리 배경 설명이다.
흑백 시퀀스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새미 젠킨스의 스토리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선행성 기억 상실증을 갖게 된 새미는 레너드가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인물이다. 보험 조사관으로 일하던 시절 레너드는 새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험 사기를 의심했다.
문제는 당뇨병이 있던 새미의 아내마저 레너드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생긴다. 배우자가 거짓말하는 게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던 그녀는 아직 주사를 맞을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남편에게 인슐린 주사를 놔달라고 한다. 결국 인슐린 과다 투여로 그의 아내는 죽음을 맞는다. 레너드는 새미가 기록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그런 비극이 절대 생기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컬러와 흑백이 거듭 교차하며 앞선 장면의 미스터리가 풀린다. 그때 왜 테디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는지, 나탈리의 얼굴엔 어쩌다가 상처가 생겼는지 시간을 거꾸로 돌려볼수록 명확해진다. 테디는 자신의 마약 조직 수사에 레너드를 이용하고 있었다. 나탈리 역시 자신의 필요에 따라 레너드에게 가짜 정보를 줬다. 그를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표정과 함께 말이다.
남의 괴로운 과거로 한몫 챙기려는 사람들
영화는 타인 앞에서 너무 강한 복수심을 드러내지 말라는 경고를 담았다. 누군가에게 앙갚음하려는 사람은 보통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마련이고, 그 수단과 방법을 제공하겠다는 장사치는 세상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레너드에게 접근한 사람들이 악용한 건 주인공의 기억 상실증 이전에 바로 복수심이다. 상처를 다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얼굴을 하거나, 널 위해 뭐든지 함께하겠다는 연기를 하면서 제 필요를 채운다.
이들은 원한을 갚으려는 자가 매달리는 기록의 불완전성을 파고든다. 기록을 본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해서 복수하려는 사람을 조종한다. 손바닥에 볼펜으로 적든, 문신을 새기든, 그 당시 상황을 카메라로 찍든 기록은 100%를 담지 못한다. 누군가 흘린 거짓 정보가 담겼을 수 있고, 기록자 스스로가 자신에게 유리한 팩트만 담았을 수 있다. 해석이 끼어들 여지가 큰 것이다.
타인의 복수심에 올라타 한탕 잡으려는 사람들 실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정치권에선 분노를 품은 민중에게 특정인 또는 집단을 복수 대상으로 제시해줌으로써 본인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시도가 역사적으로 지속돼왔다. 과거 흑사병, 한파, 가축 떼죽음 등의 원인을 '마녀'에게서 찾았던 유럽에선 현대에도 극우세력이 이민자 등 소수자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림으로써 세를 키웠다. 복잡다단한 온갖 사회 문제의 출발점으로 '적폐'를 지목하고 자신에게 불편한 집단을 하나씩 제거하려는 시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에서 제대로 된 복수가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고, 엉뚱한 사람 여럿이 피해를 입기 십상이다. 내 원한을 풀어주겠다며 손 내민 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신중히 살펴볼 일이다.
장르: 스릴러, 범죄
주연: 가이 피어스, 캐리 앤 모스, 조 판톨리아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평점: 왓챠피디아(4.1),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3%) 팝콘지수(94%)
※10월15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넷플릭스,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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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 지난 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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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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