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간첩, 서독 총리청 근무' 사건의 파문 [쓴소리 곧은 소리]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 2021. 10. 1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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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고위층이 최근 BBC 방송에 "과거 청와대에 남파 간첩 근무" 증언
1974년 브란트 총리는 간첩 귀욤이 체포되자 2주 만에 사퇴

(시사저널=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

1974년 4월24일 세상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 터졌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보좌관 귄터 귀욤이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 요원으로 밝혀져 체포되고, 2주 후 브란트 총리가 사퇴했다. 1949년 서독 건국 이후 가장 충격적인 간첩 사건이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채로 BBC 방송 인터뷰에 응한 고위 탈북자 김국성씨(가명)ⓒBBC방송 캡처

"4·15 총선 개입" 지령 받은 충청도 간첩단 사건

권력 최상부 청와대에서 남파 간첩들이 5~6년 동안이나 암약했다는 고위층 탈북자의 증언은 지난해 총선 개입 지령을 받은 충청도 간첩단 사건과 맞물려 안이해진 대북관을 심각하게 돌아보게 한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최고 정책 결정권자들 속에 북한 간첩들이 과연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분단 시기 동독과의 관계 개선에 매진했던 브란트 정부 시기의 역대급 간첩 사건을 자세하게 짚어보며 진한 경고의 종을 울리고자 한다.

1954년 자유를 향한 탈출 형식으로 서독으로 이주한 귀욤은 동독 슈타지 산하 '첩보부(Hauptverwaltung Aufklrung)'의 수장 마르쿠스 볼프의 직접 지시로 당시 야당이었던 진보정당 사민당(SPD)에 잠입했다. 불철주야 일하는 헌신과 열정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69년 브란트가 서독 총리가 되면서 총리청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귀욤은 '1급 비밀 취급 인가'를 받아 총리청 브란트 집무실 바로 옆방에서 근무하며 모든 것을 듣고 보았다. 개인 보좌관 자격으로 당 최고회의, 당 원내회의, 총재 브란트 주재 회의 등 모든 중요한 자리에 함께했다. 브란트의 선거 일정을 조직하고, 총리의 기밀 서류가방을 들고 항상 동행했으며, 총리 관저도 무시로 출입하는 등 그야말로 총리의 그림자로 행동했다.

귀욤은 특별한 군사기밀 외에 거의 모든 서독 정부의 기밀을 파악했다. 집권당의 모든 정황은 물론이고 최고지도부인 브란트, 원내대표 헤르베르트 베너, 재정장관 헬무트 슈미트(브란트 후임 총리) 간의 갈등도 훤히 들여다보았다.

브란트가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에 입각해 동구 사회주의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을 상대해 마련했던 협상 전술은 물론이고, '독일정책(Deutschlandspolitik)'에 입각해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대동독 협상 준비계획도 파악했다. 간첩 총책 볼프에 의하면 1970년 브란트와 동독 총리 빌리 슈토페 간 최초의 독-독 정상회담을 앞두고, 귀욤의 활약으로 서독 정부가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동독은 거의 완벽하게 파악했다.

총리 가족의 해외여행까지 수행하며 편지 촬영

동독은 귀욤을 통해 브란트의 생각, 서독 정부와 사민당 내의 정황을 서독 장관이나 사민당 최고위원보다 더 빨리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장관 임면, 부처 내 주요 인사이동을 장관들보다 먼저 파악하고 동독에 전달해 서독 정부 내에 침투시킨 간첩들을 시의적절하게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귀욤은 또한 서독 요원의 동독 내 침투 관련 비밀보고서도 입수해 동독이 이들을 붕괴시키거나 역공작을 펼치게 했다.

귀욤은 기밀자료를 마이크로필름화해 시가통에 담아 '하인츠'라는 접촉요원을 통해 동베를린에 전달했다. 수도 본과 인근 지역에서 배달기사 부부로 위장한 동독 요원 '아르노'와 '노라'를 정기적으로 만나 구두로도 전달했다. 1973년 6월 브란트의 노르웨이 가족여행에 동행했을 때 총리의 모든 서신이 그의 손을 거쳤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의 친서를 포함해 기밀문서를 비밀리에 호텔에서 슈타지 요원들이 촬영하도록 했다.

한편 귀욤의 아내 크리스텔도 슈타지 요원으로서 연방의원 빌헤름 비르켄바하와 서독 국방장관 게오르그 레버의 비서로 활동하며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전략 등 군사기밀을 동독에 건넸다. 그녀의 간첩 행각은 통일 이후 확보된 동독 첩보부 자료를 통해 확인되었다.

문제는 귀욤 부부가 훨씬 이전에 체포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활동 초기인 1956년에 이미 서독 보안 당국은 다수의 동독 정보통으로부터 귀욤이 동독 체제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서독의 헌법수호청도 그에 대한 간첩 혐의를 제기했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어 그를 체포할 수 없었다. 귀욤의 총리청 진입 때에도 앞서 헌법수호청에 의해 간첩 혐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총리청의 사민당 새 주인들은 그것이 "냉전 시기에 만들어진 근거 없는 혐의"에 불과하다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헌법수호청은 동독이 단파방송으로 지령을 보냈던 사민당 내 침투 슈타지 요원이 귀욤 부부가 아닐까 하는 확신을 우연히 하게 되었다. 서독 정보 당국은 동독이 1956년 2월1일 '게오르그'에게, 1956년 10월6일 '크리'에게, 1957년 4월 중순 '두 번째 남자'에게 생일 축하인사를 보낸 것을 탐지했었다.

1973년 2월 헌법수호청이 간첩 사건을 조사하던 중 귀욤이 모두 연계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일 축하인사 날짜들을 조사한 결과 바로 귀욤과 크리스텔, 그리고 부부 사이에 낳은 아들의 생일과 일치했다.

'청와대 간첩 암약'은 남북 화해 시기에도 가능해

헌법수호청은 1973년 5월29일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한스-디트리히 겐셔에게 총리청에 동독 간첩이 암약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으나,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 브란트에게도 보고되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며 그의 혐의를 일축했다. 귀욤을 즉시 체포하지 않은 결정이 브란트의 사퇴에 크게 작용했다.

동독의 슈타지는 브란트 정부가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지향하는 신동방정책에 입각한 정책을 펼친 것과는 상관없이 간첩 활동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동독 간첩 혐의자라는 서독 보안 당국의 보고에도 귀욤의 서독 총리 접근이 거부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동독 화해 및 긴장완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당시 서독 내에 급속하게 확산된 동독에 대한 '정치적 순진함(politische Naivität)'의 결과였다고 훗날 평가되었다. 서독의 대동독 긴장완화 분위기 속에서 당시 동독 첩보부가 서독 정보 당국의 태도가 완화되어 이전보다 동독 간첩들이 더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된 느낌을 받았다는 기록이 통일 이후에 발견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후보 TV토론에서 추구하는 이념적 지향성을 묻는 질문에 아직도 냉전적인 이념논쟁을 하느냐며 피해 갔다. 청와대 내 북한 간첩 암약 가능성을 냉전 논리에 따른 근거 없는 혐의라 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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