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티아고' 당진 버그내 순례길 따라 가을 익어가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순교 여정따라 걸으며 내면의 나를 마주하다/김대건 신부 생가있는 솔뫼성지 소나무숲 운치/‘십자가의 길’ 예수의 고난 조각작품으로 표현/‘조선 카타콤’ 신리성지 순교미술관 이국적 풍경·황금들녘엔 가을감성 충만/붉은 벽돌 고딕 양식 합덕성당 계단에선 ‘인생샷’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시고, 가족 간에 사랑과 기쁨을 함께 나누시며, 서로의 근심 걱정을 덜게 하소서.’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하게 모으고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인다. 깊은 상념과 함께 기도를 시작한 프란치스코 교황. 맞은편 한옥 마루에 걸린 초상화 속에서는 갓을 쓴 이가 십자가를 들고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다.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 벚나무가 순교자처럼 이파리 떨구는 가을날, 당진 버그내 순례길 따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여행에 나선다.
솔뫼성지 프란치스코 교황과 김대건 신부 조형물 |
#가을 익어가는 버그내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말한다. 813년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인 야고보로 여겨지는 유골이 발견되면서 중세 때부터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순례지가 됐다. 가장 인기 있는 ‘카미노 데 프란세스(프랑스 사람들의 길)’는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 생장피데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길로 800㎞에 달한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고된 삶에 지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인생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걸었던 흔적을 따라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다. 하루에 20㎞를 걸어도 한 달 넘게 걸어야 하기에 산티아고 순례길은 오랜 준비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는 충남 당진에 버그내 순례길이 있다. 깊어가는 가을날, 배낭 하나 둘러매고 훌쩍 가볍게 혼자 떠나기 좋은 사색의 길이다. 솔뫼성지~합덕제~합덕성당~합덕수리민속박물관~합덕농촌테마공원~합덕제중수비~원시장·원시보 우물터~무명순교자의 묘~신리성지로 이어지는 13.3㎞의 길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종교와 관련 없이 익어가는 가을풍경을 즐기며 오로지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만들기 좋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에도 비교적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언택트 관광지인 버그내 순례길은 한국관광공사 대전충남지사의 강소형 잠재관광지로도 선정됐다.
김대건 신부 생가가 있는 우강면 송산리 솔뫼성지에서 순례길을 시작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김대건 신부가 조형물 속에서 활짝 웃으며 여행자를 맞는다. 2014년 교황이 이곳을 방문한 뒤 버그내 순례길은 의미가 더욱 깊어졌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라는 안내문이 보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못 박힌 구멍자국이 선명한 정문의 예수 두 발 조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입구를 지나면 왼쪽 솔뫼아레나를 따라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로 죽음을 맞은 바르톨로메오 등 열두 제자 조각상이 이어지고 그 길 끝에서 김대건 신부 생가를 만난다. 이곳이 천주교 성지로 조성된 가장 큰 이유다.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김대건 신부(1846년 순교)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1821년 8월 21일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경기 용인 한덕동(현 골배마실)으로 이사갈 때까지 7년가량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조선의 카타콤’ 신리성지 들녘엔 황금물결 넘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당진, 서산, 아산, 홍성, 청양을 아우르는 내포지역을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고 소개하는데 내포 한가운데가 솔뫼성지다. 내포는 바닷물이 삽교천을 따라 육지로 깊숙하게 휘어 들어와 포구를 이룬 지역.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바로 이곳을 통해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게 된다. 1784년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를 처음 전파했으며 전국에서 내포에 천주교 신자와 순교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버그내 순례길은 ‘조선의 카타콤’(로마시대 비밀교회) 신리성지에서 정점을 찍는다. 삽교천 상류인 합덕읍 신리는 1866년 무렵 마을 사람 400명이 모두 신자인 교우촌으로 성장했고 선교사들의 비밀 거주지 역할을 하면서 우리나라 천주교 전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 인물이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로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손자선 토마스의 집에 은거하면서 황석두 루카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한글로 번역했는데 그의 비밀성당과 주교관이 현재 초가로 복원돼 있다.
신리성지 입구에 들어서니 가을 정취가 가득하다. 넓은 잔디밭으로 꾸며진 공원 끝자락에 이국적인 건물로 세워진 순교미술관 덕분에 낭만적인 가을 사진을 남기기 좋다. 미술관에는 신리성지 소개와 함께 이종상 화백이 3년 동안 작업한 뒤 기부한 순교 기록화 13점이 전시돼 있다. 초대형 캔버스 작품으로 김대건 신부 서품식, 선교사들의 활동, 다섯 성인의 순교, 신리신자들의 체포 장면 등이 담겼다. 순교미술관 옥상에도 꼭 올라보길. 지붕 꼭대기에 두 팔 벌린 사람 형상 십자가와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지는 내포평야의 벼들이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풍경이 잊지 못할 가을여행의 추억을 남긴다.
당진=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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