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은 정말 적을 수장시켰을까? [물에 관한 알쓸신잡]

이명철 입력 2021. 10. 16. 11:22 수정 2021. 10. 1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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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가두는 기술과 '평화의 댐'

[최종수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우리 역사에 남을 한국사의 3대 대첩이라고 부릅니다.

대첩은 적과 싸워 크게 승리한 것을 말하는데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한 전투는 모두 물과 관련됐습니다.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은 물론이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물로 적을 물리친 수공(水攻)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워터파크 풀에서 사람들이 수영하고 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수공은 전쟁에서 물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공의 일반적인 방법은 보를 이용해 물을 막았다가 적들이 강을 건널 때 보를 터뜨려 적을 수장시키는 방법입니다. 언뜻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먼저 물을 가두기 위해서는 보를 만들어야 하는데 살수대첩이 있었던 고구려 시대의 토목기술로는 충분한 양의 물을 가둘 보를 단기간에 축조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를 이용해 저수지를 축조하는 기술은 김제 벽골제에서 알 수 있듯 삼국시대에도 가능했지만, 전쟁기간 동안 단기간에 축조하기가 어려웠다는 겁니다.

만일 단기간에 보를 축조했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타이밍에 물을 한꺼번에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보를 순식간에 무너뜨려야 하는데 폭파기술이 없었던 당시에는 이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양의 물을 가뒀다가 일시에 흘려보내는 토목기술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수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들이 도와줘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강을 건너는 도하작전은 적의 공격에 직접 노출되는 위험 때문에 신속하게 건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준비한 수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들이 강 가운데에서 일정 시간 동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마치 워터파크의 파도풀장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강 가운데에서 물이 밀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물을 이용해 적을 수장시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을 언급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서에는 보를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나라 근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두 대첩을 수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로 적을 쓸어버리는 수공이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했음에도 우리는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을 수공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두 대첩을 묘사한 민족기록화가 물을 이용해 적을 수장시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고구려 살수대첩 이후 1000년이 지나는 동안 단기간에 보를 쌓는 기술도, 순식간에 보를 무너뜨리는 기술도 가능해졌습니다. 즉 물로 적을 물리치는 수공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지요. 그리고 이 가능성은 현실이 됩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1986년 우리나라 정부는 북한이 북한강 상류에 금강산 댐(임남댐) 건설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댐의 목적은 수공 작전을 통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드는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당시 정부는 금강산댐의 저수량이 최대 200억t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붕괴되면 12시간 만에 수도권이 완전히 수몰돼 63빌딩의 중턱까지 물이 차오를 수 있다는 일명 ‘서울 물바다’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시기적으로 88올림픽이라는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었고,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높은 건물인 63빌딩 절반이 물에 잠긴다는 정부의 발표는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규탄대회가 연일 계속되고 이에 대한 대응 댐인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전 국민 모금운동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순식간에 700여억원의 성금이 모였고 국고 867억원을 더해 1506억원을 들여 1987년 2월 강원도 화천군에 평화의 댐을 착공했습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돼 착공 2년만인 1989년에 높이 80m의 댐이 완공됐습니다.

댐이 준공되고 난 뒤 정권이 바뀌면서 전 정권에 대한 청산 작업이 시작됐고 금강산댐도 대표적인 재평가 대상 사업이 됐습니다. 재평가 결과 금강산댐은 정국 불안 조성을 목적으로 추진됐으며 ‘서울 물바다’ 시나리오는 과장됐다는 내용의 감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당시 금강산댐의 위협에 대한 정부 발표는 사실 전달보다는 국면 전환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 우선됐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계획과 그 댐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는 비판과는 달리 평화의 댐은 준공 이후 댐으로서 홍수조절 기능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1996년, 1999년 여름철 폭우가 있었을 때 평화의 댐 저류를 통해 하류에 있는 화천댐의 범람을 막았습니다.

2002년에는 금강산댐에서 엄청난 양의 토사와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와 평화의 댐이 범람 위기까지 겪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증축 공사를 시작해 2005년 10월 지금의 높이 125m 댐이 완성됐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북한의 수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댐은 정권이 바뀌면서 대국민 사기극으로 평가됐고, 다시 정권이 바뀌면서 홍수 조절 필요성이 제기돼 지금의 댐으로 증축됐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평화의 댐’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지만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우여곡절도 많았고 평화와는 거리가 있는 듯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명철 (twomc@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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