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이는 영화인으로서 30년의 숙제였어요"

김종철 2021. 10. 1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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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한겨레S] 커버스토리
'영화 예술인' 이은·심재명 부부의 <태일이>
“<태일이>는 30년 전에 만들려고 했던 영화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를 제작한 명필름의 이은(왼쪽), 심재명 공동대표가 지난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명필름아트센터의 영화 포스터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파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오락물이 판치는 영화판에서 ‘영화는 예술이다’라는 생각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 영화가 단지 유희나 심심풀이용 창작물에 그쳐서는 안 되고, 인간과 사회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영화를 예술의 수단으로 삼지는 않으며, 무겁게 접근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한계, 갈등과 연대 등을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30년 가깝게 쌓아올린 필모그래피(영화 목록)는 그 자체가 ‘예술적’이라고 할 만큼 주제와 소재가 다양하다. 사랑을 다룬 <접속>(1997년)과 <건축학개론>(2012년), 분단 현실을 그린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아이 캔 스피크>(2017년), 사법정의를 다룬 <부러진 화살>(2012년),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와 장애인 얘기를 제기한 <카트>(2014년)와 <나의 특별한 형제>(2019년)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제작사 ‘명필름’의 공동대표인 심재명, 이은이 그들이다.

올가을 명필름이 새로운 ‘예술’ 두편을 내놓았다. 애니메이션 <태일이>와 다큐멘터리 <노회찬6411>이 그것이다. 1970년 11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숨졌던 전태일, 약자 편에 서서 정치 혁명을 꿈꿨던 노회찬의 삶을 그린 영화다. <노회찬6411>은 14일에 개봉했으며, <태일이>는 다음달 하순 영화관에 걸릴 예정이다. 두 영화의 제작자 부부를 지난 5일 경기도 파주 명필름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이후 전화로 추가 인터뷰했다.

<태일이> 포스터. 명필름 제공
영화 <태일이>의 한 장면. 명필름 제공

<노회찬 6411> 이어 전태일 삶 그린 <태일이> 제작
부산영화제 상영때 전태일 영화에 관객 눈물과 감동
“영화는 예술…사회적 약자 얘기 담아내는 것은 당연”

염혜란 등 출연 배우들도 눈물

―<태일이>는 지난 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을 처음 만났는데 반응이 어땠어요?

“예상했던 대로였어요. 객석이 꽉 찼을 뿐 아니라 관객들이 아주 집중해서 영화를 보더라고요. 영화가 끝난 뒤 많은 분들이 눈가를 닦더군요. 목소리 연기를 했던 배우들도 완성된 작품을 이번에 처음 봤는데 그들도 다 울더라고요. 태일이 어머니(이소선) 역을 했던 염혜란씨는 어린 시절 태일이가 노는 장면에서부터 눈물이 났다고 해요.”(이은)

―감동적인 장면이 많은 것 같군요.

“네. 관객 중에는 전태일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충격적이었다고 얘기하더군요. 스토리를 모르고 보다가 태일이 자신을 희생시키는 모습에서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고 해요. 또, 마지막 엔딩을 장식하는 음악이 너무 좋고, 후원자들의 이름이 9분 동안이나 화면을 꽉 채우는 것도 인상적이었다는 반응이었어요.”(이은)

전태일은 1964년 열여섯의 나이에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한 피복점의 미싱사 시다(견습공)로 노동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하루 14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의 대가는 당시 커피 한잔 값에 해당하는 일당 50원이었다. 최상급 기술자인 재단사가 된 뒤에도 그는 자신을 챙기기보다 여성 노동자 등 동료들을 더 배려했다.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자기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줬다. 폐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해고당하는 것을 보고 노동 현실에 눈떴다.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고는 해설서를 구해 밤늦게 혼자 공부했다. 부당한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보냈지만 철저하게 외면받자,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자신을 불살랐다.

―<태일이>는 원래 작년에 개봉하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네, 2018년부터 본격적인 제작을 시작했어요.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기인 2020년 11월 개봉을 목표로 했는데 예기치 못한 코로나 사태와 여러 이유로 1년 미뤄졌죠.”(이은)

―명필름이 실존인물을 영화로 만든 것은 처음인데, 이번에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계기는 뭐예요?

“전태일 이야기는 명필름 초창기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었는데 쉽게 엄두를 못 냈던 작품이에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 영화가 나와서 더 그랬죠. 그러다가 <마당을 나온 암탉>(2011년)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성공에 용기를 얻어서 전태일 이야기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어떨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마침 최호철 작가의 <태일이> 만화책을 보고는 해보자고 결심했죠. 그러고도 10년이나 걸렸어요. 노회찬 의원 다큐멘터리는 작년 초에 아는 방송사 피디님이 아이디어를 줘서 시작했고요. 하다 보니까 개봉 시기가 비슷하게 됐네요.”(심재명)

“<태일이>는 사실 30년 전에 만들려고 했어요. 1990년 <파업전야> 상영이 끝난 뒤 영화창작단체인 ‘장산곶매’의 다음 프로젝트로 동료들과 준비했었는데 뜻대로 안 되었고, 이제야 마치게 되었죠.”(이은)

<파업전야> 만들었던 이은

―<태일이>는 이은 대표님의 오랜 숙제였었네요.

“그렇죠. 왠지 꼭 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았어요. 영화 하는 사람으로서 말이죠.”(이은)

―왜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태일은 산업화되고 민주화된 우리 시대와 사회를 규정하는 출발선인 것 같아요. 전태일의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이 없잖아요. 제가 대학을 갔을 때 대학생들이 다 전태일의 영향을 받아서 올바로 살아야 되겠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영향이 큰 사람인데 지금은 시간이 갈수록 전태일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 같고, 이웃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태일이 더 생각나죠.”(이은)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김용균씨나 이선호씨의 죽음에서 보듯이 노동이 왜곡되고 폄하되고 있잖아요. 외국에는 켄 로치라든가 다르덴 형제 등 전문적으로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를 담은 영화들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국 영화계의 이른바 주류에서는 노동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저희 두 사람의 영화 디엔에이(DNA)는 다른 것 같아요.(웃음) 영화인으로서 저희 가치관이나 태도가 <태일이>에 응축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심재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홍준표(36) 감독이 <태일이> 연출을 맡았으며, 전태일 역의 장동윤을 비롯해 염혜란(어머니 이소선 여사), 진선규(아버지), 권해효(한미사 사장), 박철민(재단사 신씨), 태인호(오 형사) 등 실력파 배우들이 주요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실사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 한 이유는요?

“최호철 작가의 원작 만화가 너무 좋아서 영상화해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고요, 또 하나는 제작비 문제와 관련됐어요.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세트장으로 만들려면 비용이 아주 많이 들거든요. 또, 애니메이션은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장르여서 잘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판단도 했고요.”(심재명)

이은 명필름 공동대표는 “영화 <태일이>는 사실 30년 전에 만들려고 했어요. 왠지 꼭 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았어요. 영화 하는 사람으로서 말이죠”라고 말했다. 파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은과 심재명은 비슷한 시기에 영화계에 발을 들여놨지만, 출발점은 반대였다. 이은은 대학 3학년 때 독립영화 단편 <공장의 불빛>으로 영화계에 첫 이름을 알렸다. 이후 1980년 광주를 소재로 한 <오! 꿈의 나라>(1989년)는 연출을, 평범한 노동자가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을 그린 <파업전야>(1990년)는 제작으로 참여하는 등 영화운동을 했다. 반면에 심재명은 1987년 서울극장·합동영화사에 공채로 입사한 상업 영화 마케팅·기획 전문가였다. 둘은 1994년 결혼한 뒤 이듬해 명필름을 설립했다. 첫 영화인 <코르셋>이 흥행에 실패했지만, 두번째인 <접속>부터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심재명은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명필름은 특이하게도 상업 영화뿐 아니라 <카트> 등 노동이나 여성, 사회적 약자 등에 대한 영화를 끊임없이 만들어왔어요. 그러면서도 26년을 잘 버티고 있고요.(웃음)

“저는 정신적으로나 다른 뭔가의 결함이 있는 주인공들이 그것을 극복하거나 성장하는 게 영화의 기본 플롯이라고 생각해요. 상업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결국 대부분의 영화들은 누군가의 성장담이고 변화하는 이야기죠. 주인공이 변화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죠. 그런데 명필름은 그 결함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 속의 약자나 소외된 사람 쪽에서 찾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저희는 약자들이야말로 영화적으로 만들어볼 만한 굉장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도 마찬가지고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내야 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죠.”(심재명)

“저희 회사가 사회적인 얘기를 두드러지게 다룬다기보다는 우리나라 영화가 대체로 그걸 못 다루고 있는 거죠. 미국 영화를 롤모델로 하고 영화 산업을 대기업이 주도하다 보니까 영화는 오락상품이고 돈 벌기 위한 일종의 사업이라고 생각들 하죠. 따라서 창작자들이 영화를 예술로 추구하기가 힘든 환경이고, 관객들은 다양한 영화를 볼 권리를 놓치고 있고요. 그러나 예술의 본질,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술을 찾는 이유는 당대의 문제점들을 찾고 공감하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저희는 여건이 약간 허락해서 그런 것을 나름대로 꾸준히 하고 있는 정도라고 보면 맞을 것 같아요.”(이은)

심재명 명필름 공동대표는 “저희는 약자들이야말로 영화적으로 만들어볼 만한 굉장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도 마찬가지고요”라고 말했다. 파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카트>는 심재명이 먼저 제안

―여건이 허락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접속>부터 초기 작품 4개가 연속 흥행에 성공한 덕분이죠. 그때 약간 용기를 내서 도전했던 게 <공동경비구역 JSA>였어요. 박상연 작가의 소설(<DMZ>)을 읽고서는 ‘우리도 상업 영화만 할 게 아니라 분단 문제를 성찰하는 이런 영화도 만들자’고 결심했죠. 그런데 서해교전이 일어나서 자칫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것 아닌가 하는 각오까지 했었는데 거꾸로 또 흥행이 됐잖아요. 그다음부터는 저희가 모든 걸 좀 자신 있게 했던 것 같아요. 예술성 있는 것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에 도전했죠. 그런 진정성이 사람들한테 먹혀서 또 잘됐어요.”(이은)

“지금은 그런 결과로 흥행 성적이 별로 안 좋습니다.(웃음) 삶이란 게 그렇게 도는 거잖아요. <공동경비구역 JSA>가 크게 성공하니까 주변부 인물들의 얘기인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만들었고, 그게 흥행이 안 돼서 다시 정신 차리고 그랬죠.(웃음)”(이은)

―심 대표님이 흥행이 잘되는 영화를 기획해서 돈을 벌면 이 대표님이 사회성 짙은 영화나 예술 영화를 해서 밑지는 그런 패턴 아닌가요?(웃음)

“그렇지는 않아요. 초반에는 각자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교집합처럼 만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상업 영화를 주로 기획하고 마케팅 했던 제가 갑자기 <카트>를 만들자고 그랬어요. 이제는 만들려고 하는 영화나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서로 비슷해져서 더 고생하고 있습니다.(웃음)”(심재명)

“저희가 결혼할 때 정지영 감독님이 사회주의랑 자본주의가 결혼한다고 농담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반대예요. 저는 상당히 부드러운 대신에 심 대표는 나보다 좀 과격한 데가 있거든요.(웃음)”(이은)

이은이 영화계에 들어온 것은 우연의 결과였다. “중·고교 때 공부 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놀다 보니” 입시 때 갈 만한 대학이 없었다. ‘너는 사람을 잘 웃기니까 연극영화학과에 가는 게 어때’라는 친구의 말에 부랴부랴 실기 준비를 해서 1981년 중앙대 연극영화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에서는 탈춤반 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군 제대할 즈음에 당시 대세에 따라 노동 현장을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그건 자신도 없었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복학했어요. 뭘 할까 하다가 당시 주목받던 임권택 감독님처럼 좋은 영화를 만들어 사회에 목소리를 내자고 결심했죠. 당시 이장호 감독님이 만든 <바보선언>에서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기도 했고요. 뒤늦게 바닥에서부터 영화를 배웠죠.”

심재명은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키즈였다. 중학교 1학년 때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주말의 명화’를 보고는 처음 영화의 매력에 빠졌다. 그때부터 혼자 일기 쓰듯 영화 감상문을 썼으며, 대학(동덕여대 국문학과) 때는 외화를 보기 위해 프랑스 문화원과 독일 문화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또, 영화 월간지 <스크린>의 대학생 모니터 기자 활동을 하기도 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영화 전공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줄 알았어요.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서 잠깐 일하던 때에 서울극장·합동영화사 직원을 뽑는 광고를 보고는 이거다 싶었어요. 그때도 벌이가 시원찮다는 연출부는 꿈도 못 꾸고, 좋아하는 영화 일도 하고 월급도 따박따박 받을 수 있는 기획 담당을 선택했죠.”

“미국 영화처럼 우리나라도 영화 산업을 대기업이 주도하다 보니까 영화는 그냥 오락이고 돈 벌기 위한 일종의 사업으로 여기죠. 따라서 창작자들이 영화를 예술로 추구하기가 힘든 환경이고, 관객들은 다양한 영화를 볼 권리를 놓치고 있고요.” 영화제작사 ‘명필름’의 심재명(왼쪽), 이은 공동대표가 지난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명필름아트센터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파주/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오징어 게임> 이면 한국영화 그늘 짙어

명필름은 신진 영화인을 양성하는 명필름영화학교(현 명필름랩)를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훌륭한 예술가들이 한국 영화의 건강한 정신, 전통, 이런 것들을 이어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 섞인 바람”(이은)에서다. 매년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2~3명을 뽑아서 2년간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영화 제작을 돕는다. <환절기>, <박화영>, <국도극장>, <빛나는 순간> 등이 명필름랩에서 만든 영화들이다. 그러나 둘의 고민은 랩을 넘어 한국 영화의 미래에 가 있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에서 보듯 대중 문화에서의 이른바 케이(K)콘텐츠의 역량은 대단한 것 같아요.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도 있고요. 그러나 그 속에는 짙은 그늘이 있죠. 저희와 함께 활동했던 작은 영화 제작사와 영화인들이 거의 다 사라졌잖아요.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다양성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죠. 저희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심재명)

“정책 하는 사람들은 지금 엄청나게 혼동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국회의원들은 글로벌 자본인 넷플릭스가 우리나라 영화계를 위기에 빠트리고 있다면서 국내 대기업 자본을 어떻게 살릴지에 관한 법안만 고민하고 있어요. 작은 영화사들, 작은 배급사들, 예술 영화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고요. 다양성을 해치는 스크린 독과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요. 대자본 영화에 대한 지원은 산업통상자원부가 하면 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는 다양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야 해요. 그건 돈이 많이 들지도 않고, 생각만 바꾸면 되는 일이에요. 그래야 한국 영화의 건강함이 유지될 텐데, 지금 이대로 가면 젊고 좋은 영화인들이 다음 영화를 한다는 보장이 없어요.”(이은)

‘잘나가는’ 영화인이 내쉰 한숨과 경고의 목소리가 파주출판도시 영화마을의 썰렁한 거리를 메아리로 떠도는 듯했다.

파주/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조아라

영화 <태일이>의 한 장면. 명필름 제공

<태일이>에 한국 애니메이션 미래 걸려
제작위원·후원 추가 모집

<태일이>를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로 한 것은 큰 도전이었다. 원작 만화의 느낌을 살리기 위한 것도 있지만, 애니메이션을 선택한 큰 이유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실사 영화로 갈 경우 1960~70년대의 분위기를 살리는 세트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고 결코 저예산 영화가 아니다. 그림을 한장 한장 다 그려야 하는데 그만큼 제작 인력과 시간이 든다. <태일이>도 30억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었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영화 투자자들이 애니메이션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태까지 크게 성공한 애니메이션이 없기 때문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는 명필름에서 만든 <마당을 나온 암탉>(2011년)이 최고 흥행 성적(220만명)을 기록했다.

2018년 8월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돼 받은 7억원으로 <태일이>의 마중물이 마련됐으나, 역시 대기업 투자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제작을 완성시킨 힘은 일반 시민이었다. 카카오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카카오같이가치’에서 2019년 1월에 벌인 크라우드 펀딩은 목표(1억원)를 초과했다. 또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명진 스님,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가수 정태춘, 송경동 시인 등 각계 인사 166명이 지난해 ‘1970인 제작위원’을 제안했다. 전태일 열사가 숨진 1970년을 상징하는 숫자다.

아직 1970명이 다 차지 못해, 이달 말까지 제작위원과 후원자 문호를 열어두고 있다. 제작위원 참여자는 수익이 나면 비율대로 돌려받을 수 있다.(제작위원 신청은 인터넷 누리집 bit.ly/태일이2021, 후원은 전태일재단 누리집 www.chuntaeil.org)

이은 명필름 대표는 “<태일이>의 성공 여부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와도 직결돼 있다. 디즈니와 일본 애니메이션에만 계속 박수 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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