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쉽] 김정은은 정말 종전선언을 원할까?
올해 북한은 핵실험이나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발사처럼 미국이 묵과할 수 없는 도발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많은 일을 벌여 우리 정부를 들었다놨다 하며 한반도의 진정한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했다.
한반도정세의 '운전자'를 자임했지만 실질적 성과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어 온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를 6개월 남겨둔 시점에 승부수를 던졌다. 지난 9월22일(미국 현지 21일) UN연설을 통해 북한과 미국에 다시한번 '종전선언'을 제안한 것이다.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한 것은 종전선언 제안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다.
[그게 뭐길래] 종전선언, 무엇을 하자는 것?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정전협정) 서명으로 일단락됐다. 정전(停戰)협정에는 유엔군 총사령관 미 육군대장 마크 웨인 클라크, 북한군(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팽덕회) 세 사람이 서명했다.
일반적으로 휴전협정은 이후 영속적인 효력을 갖는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고, 이는 당사국 의회의 비준을 받는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후속절차 없이 '전투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여 옴으로써 실질적으로 평화를 지속해 왔다. 일반인의 삶에 비유하자면, 공식적으로 금연한 것은 아니지만 매일 '오늘만 피우지 말자'는 다짐을 유지하며 수십년 살아온 격이다.
- * 누가: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서
- * 무엇을: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함께 선언하자.
- * 언제 어디서 어떻게: 명시하지 않음.(추후 협의하여 정할 문제이기 때문에)
- * 왜: 비핵화의 불가역적 진전과 함께 완전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종전선언의 효과] 정전체제는 어떻게 되나?
'정전'(전쟁이 멈춘 상태)이 '종전(전쟁이 끝났음)'으로 바뀌게 되면 이러한 체제는 어떻게 바뀌는 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유엔군사령부는 존립 근거를 잃게 될 수 있다.
주한미군은 또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한미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주한미군은 정전협정이 아니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서 주둔하는 것이므로 종전선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났는데 왜 안 나가느냐" 는 나라 안팎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법적 구속력은] 정치적 선언일 뿐 취소하면 된다?
[어떻게 여기까지] 종전선언 제안, 이번이 처음 아니다
"현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 2007.10.4 남북정상회담 합의서 중에서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 2018. 4.27 판문점선언 3조3항
[왜 꼬였을까?] 북핵 해결 없는 종전선언 거부한 미국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마친 뒤 북한은 미국에 미군 유해를 송환해 주면서 종전선언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북한이 '핵물질 신고목록'을 먼저 제출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핵 신고는 핵 사찰의 전단계다. 북한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한미 양국 정상은 종전선언 문제에 대해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한의 요구 변화] 종전선언 → 제재 해제 → 적대시 정책 철회
2019년 2월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김정은이 제재 해제를 얻어내기 위해 벼르고 벼른 승부수였다. 당시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을 포기하는 댓가로 안보리 제재 해제를 트럼프에게서 받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그게 가능하다는 얘기를 북한의 외교 당국자, 그리고 중재역을 자임하던 한국정부 인사들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에 나타난 트럼프는 김정은의 예상을 벗어난 요구를 했다. 이미 낡고 알려질만큼 알려진 영변시설 외에 다른 핵시설까지 내놓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김정은은 당황했고, 분노했다. 평양으로 돌아간 김정은은 이후 미국과 한국에 대한 관계를 본격적으로 경색시키며 '나 화났다'는 티를 낸다.
2019년 봄의 김정은은 핵시설과 안보리 제재를 맞바꾼다는 안을 버렸고, 남한으로부터의 경제협력에도 더이상 매달리지 않았다. 그해 4월, 김정은은 자신들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강하게 내걸기 시작한다. 한국의 신형무기 도입이나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부쩍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끊었다 이었다 제멋대로…'통신망 정치'는 주한미군/ 연합훈련 압박 수단?
그러더니 올해 7월27일(정전협정 기념일)에 느닷없이 통신선 복원을 통보해 왔다. 단절 13개월 만이었다. 그간의 일방적인 관계 악화 조치에 대한 유감표명 같은 건 없었다.
"조선반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무력과 전쟁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
- 김여정 8월10일 담화 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종전선언 제안을 띄운 9월하순 UN 연설은 이런 맥락 위에서 나왔다.
[종전선언 제안에 대한 북한의 반응] 이례적인 '연거푸' 성명
"조선반도와 주변의 지상과 해상,공중과 수중에 전개되여있거나 기동하고 있는 미군 무력과 방대한 최신 전쟁자산들 그리고 해마다 벌어지는 각종 명목의 전쟁연습들은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이 날이 갈수록 더욱 악랄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리태성 북한 외무성 미국 담당 부상 9월24일 담화 중에서
"지금과 같이 우리 국가에 대한 이중적인 기준과 편견, 적대시적인 정책과 적대적인 언동이 지속되고있는 속에서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종전을 선언한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중략) 서로 애써 웃음이나 지으며 종전선언문이나 낭독하고 사진이나 찍는 그런것이 누구에게는 간절할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가 없고, 설사 종전을 선언한다 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것이라고 생각한다."
- 김여정, 9월24일 담화 중에서
그러면서, 종전선언 논의를 위한 '선결조건'을 내건다.
북한이 말하는 '이중 기준'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자신들의 (핵)무력 강화를 문제삼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게 '이중기준 철폐하라'는 요구의 속뜻이다.
이날 북한은 평안남도 양덕의 열차 발사대에서 단거리 탄도미사일 2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비행거리는 800㎞, 고도는 60여㎞로, 안보리 결의 위반이었다.
김정은 본인 등장…'중대과제' 제시
[그게 뭐길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란?
김정은 위원장도 10월11일 국방발전전람회(자위-2021) 기념연설에서 "미국이 최근 들어 북한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신호를 빈번히 발신하고 있지만 적대적이지 않다고 믿을 수 있는 행동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노동신문 보도)
그렇다면, 북한이 말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는 뭘 하라는 걸까? 이는 백두혈통 김 남매보다 좀 더 실무적인 얘기를 하는 외교당국자들의 발언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조선반도와 주변의 지상과 해상,공중과 수중에 전개되여 있거나 기동하고 있는 미군 무력과 방대한 최신 전쟁자산들 그리고 해마다 벌어지는 각종 명목의 전쟁 연습들은 미국의 대 조선 적대시 정책이 날이 갈수록 더욱 악랄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주한미군, 그리고 한반도에 전개할 수 있는 일본이나 괌 등의 미군 전략자산 모두가 '대북 적대시 정책'의 구현이라는 것이다. 여러 담화나 연설에서 이런 입장이 거듭 표출된다는 것은 이것이 북한 수뇌부의 정리된 인식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김여정도 지난 8월 한미연합훈련 취소요구 당시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무력과 전쟁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왓 김정은 원트]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하면, 북한은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 개입할 수 없는 전략적 상태'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가 되면 북한은 굳이 힘들여 무력남침을 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의지를 남쪽에 관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무기를 전략 자산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남조선은 우리 무장력이 상대할 대상이 아니다"라는 김정은의 지난 10월11일 발언 (자위-2021 무기전시회)은 어느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이러한 상태가 쉽게 달성될 것이라고는 북한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전쟁이 정전상태에 들어간 1953년 7월 이후, 한 순간도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다. 때로는 유화 제스처를 통해서, 때로는 무력도발을 통해서 혼란을 조장해 왔지만, 어떻게든 한미동맹을 갈라놓고 한반도를 온전히 제뜻대로 요리하고자 하는 것이 북한의 일관된 바람이다.
전략적인 독상 차리기, 다시 말해 남들 간섭받지 않고 원하는 바를 채울 수 있는 상태 만들기. 이것에 무척이나 집착했던 20세기 정치인이 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는 어느날 갑자기 미치광이처럼 주변국을 침공했던 게 아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를 집어삼키기 전에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집요하게 외교전을 벌였다. '저거 어차피 다 역사적으로 독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땅이야. 저기까지만 눈감아주면 우리도 굳이 너희와 피흘리지 않을거야. 너희도 1차대전에서 많이 깨져서 또 싸우기 힘들잖아?' 그 말에 결국 넘어간 영국과 프랑스는 중부유럽에 히틀러의 독상을 차려주는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북한이 종전선언에 긍정적으로 호응하고 나서는 건,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다는 전략적 목표에 한걸음 다가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 설 때 뿐일 것이다. 또는 종전선언에 목말라하는 일방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거나 그 일방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설 때 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는 신뢰를, 북한이 우리에게 준 적이 있었던가?
나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인지라, 나라간의 복잡한 일도 결국 사람간의 일을 닮게 마련이다. 개인간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아쉬운 쪽, 마음 급한 쪽, 매달리는 쪽이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대선이 이제 넉달 반 남았다. 한반도 정세에 미지의 실험을 하기에 과연 좋은 시기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구성 : 이현식 선임기자, 장선이 기자, 김휘란 에디터 / 디자이너 : 명하은, 박정하)
이현식 기자hyunsik@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이제 맞지 말고 붙이세요…주사 공포 없애는 '백신 패치'
- 세금 감면 받는 지식산업센터에서…가상화폐 채굴 중
- '중국 귀화' 임효준…'베이징 올림픽 출전' 무산
- 고 홍정운 군 추모제…“엄벌·진상 규명” 부모 진정
- 확진자 시신 하루 넘게 고시원 방치…지침 '구멍'
- “대장동 이 책임” 67.7%…“고발사주 윤 책임” 55.7%
- '보험금 살인극' 벌인 10대들, 동료들까지 '살인 먹잇감'
- 가짜 의사 면허증으로 신분 세탁…女 20명 사귄 '애 아빠'
- '문명특급' 이하늬, 채식주의 종료 선언?…“이젠 고기 먹는다”
- 방탄소년단 뷔, 황당 열애설에 불쾌한 심경 표출 “한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