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종로~명동 산보 도우미 '스틱 걸'의 탄생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1. 10. 1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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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모던 보이,모던 걸,종로와 진고개 누벼
서양식 모자와 나팔바지 차림 모던 보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왼쪽 남자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조선일보 1928년 2월7일자

‘경성에는 산보하고 싶은 길이 없다. ‘별 일 없는 시간이니 OO이나 걸을까’하고 나설 산보할 거리가 없다.’

1927년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인구 40만 대도시 경성에 산보할 만한 거리가 없다는 불평이었다. ‘길가의 나무와 상점의 진열장에서 흘러나오는 맛’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서로 조화되는 데서 생기는 맛’ ‘거기에 싫증이 나면 들어앉아 간단히 다리 쉬어갈 수 있는 곳에서 생기는 맛’ 등이 어우러져 산보객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줄 만한 거리가 없다고 했다.

◇유행의 전시장, 종로 네거리

그래도 이 잡지 필자가 선택한 산보지는 종로 네거리(지하철 1호선 종각역)와 진고개였다. 종로 네거리 랜드마크인 화신백화점이 들어서려면 몇 년 더 기다려야했지만, 그나마 이곳이 그럴 듯한 산보지였던 모양이다.

‘아직 건축물은 정돈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 통일·조화의 유무도 말할 것 못되지만은 사방으로 시원하게 뚫린 넓은 길이 아무 때 나서도 시원한 곳이다. 자동차가 무례히 지나다니는 것은 불쾌하나 부드러운 아스팔트를 밟고 걷는 맛은 구두 신은 사람일수록 단장을 짚은 사람일수록 아무 바쁜 일 없이 산보하러 나선 사람일수록 더 잘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라도 여기를 나서면 말소리도 커지고 단장도 더 휘둘러지는 것이다.’(蒼石生, ‘鍾散이, 진散이’, 별건곤 1927년2월)

이런 저런 유명 인사들과 마주치는 재미도 있지만,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차림새를 구경하는 거리이기도 했다. ‘가지 각색의 성명모를 젊은 친구들이 가지 각색의 개성 취미를 발휘한 복색을 차리고 나와서 경성의 새 유행을 보여준다. 전에 못보던 치마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전에 없던 양산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종로에 나가면 볼 수 있는 것이다.’

경성 쇼핑과 유흥 중심지 혼마치(충무로) 입구. 카페와 상점이 즐비한 혼마치는 모던보이, 모던 걸이 산보삼아 거닐던 코스였다. 왼쪽 건물이 경성 우편국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책방과 카페의 진고개

종로를 거쳐 가는 곳은 진고개(현 충무로2가)였다. 책방과 카페가 즐비하고, 젊은 여성들이 즐겨 찾던 거리였다. 미쓰코시 백화점과 조지야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부터 진고개는 ‘모던’의 본산이었다. ‘요지경 속 같은 전기불 바다를 헤엄하듯 걸어들어가면 젊은 여성의 전람회라 할만치 흘겨보아도 좋고 노려보아도 좋고 가깝게 가서 분내를 맡아 보아도 좋을 낯모를 미인들이 수없이 마주쳐준다. 그들이 가진 젊음! 그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를 젊게 해준다.’

걷다가 지치면 책방에 들어가 잡지와 신간을 뒤적이고 또 피곤하면 카페로 들어가 ‘차 한잔이나 쏘다수 한잔으로’ 피로를 녹였다. 일본인이 주로 살던 남촌 혼마치(本町·지금의 충무로)는 소비·유흥의 중심지였다.

종산이들이 산책하던 종로 네거리 풍경. 대로는 널찍하게 정비됐지만 종로의 랜드마크인 화신백화점이 들어서기 전이라 썰렁하다.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밤거리 밝힌 夜市

종로 거리는 전깃불 밝힌 야시(夜市)가 구경거리로 인기였던 모양이다. 1927년 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벌써 야시가 열리어 온 겨울동안 방안에서 꿍꿍이 셈을 대든 ‘하이카라’ 아가씨와 서방님들의 산보가 야단이다. 어떤 ‘하이카라’는 단장을 함부로 내흔들다가 남의 머리를 맞혀 경을 치는 사람도 있고, 어떤 ‘하이카라’ 부부는 동부인 산보를 한다고 손을 마주잡고 군중의 틈으로 다니며 키 큰 사람은 허리도 걸어넘기기도 하고 어린 사람은 턱도 걸어 넘기니 위태해서 야시 구경이나 가겠나.’(조선일보 1927년4월9일 ‘휘파람’)

도심 산보를 즐기던 모던 커플이 아이스커피 한잔을 놓고 빨대로 같이 마시고 있는 만문만화. 조선일보 1930년 7월16일자

◇도쿄의 긴부라, 경성의 혼부라

도쿄 번화가 긴자(銀座) 거리를 누비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을 ‘긴부라’로 불렀던 것처럼, 혼마치를 거니는 사람들을 ‘혼부라’라고 불렀다. ‘종산이’(종로 산보객), ‘진산이’(진고개 산보객)는 ‘긴부라’, ‘혼부라’의 번안인 셈이다.

‘소위 ‘혼부라’당의 음모가 1930년의 여름에는 더욱 노골화하야 진고개 차집, 빙수집, 우동집, 카페ㅡ의 파루수룸한 전등 아래에 백의(白衣)껄이 사나희와 사나희의 날개에 가리워 전기유성기 소리에 맞추어 눈썹을 치올렸다 내렸다 하며 새소리 같이 바르르 떠는 소리로 노래를 한다. 칼피스, 파피스도 좋거니와 잠오지 않게 하는 커피에도, ‘아이스커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하여다가는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빨아먹는다. 사랑의 아이스커피ㅡ’(안석주, ‘1930년 녀름’, 조선일보 1930년7월16일)

시내 산보를 즐기던 화가 도상봉, 나상윤 부부. 한달에 절반쯤은 산보를 다닌다는 인터뷰가 조선일보 1932년1월2일자에 실렸다. 아래 큰 사진은 나상윤, 작은 사진은 도상봉.

◇'종산이, 진산이’ 도상봉 부부

조선일보 1932년 1월2일자엔 당시 드문 화가 부부였던 도상봉·나상윤 집을 찾아가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자유결혼의 신가정방문기-채색으로 영롱히 그린 화폭 같은 스위트홈 생활’. 남편과 일본 유학을 함께한 나상윤(1904~2011)은 대표적인 모던 걸이었다. 기자가 ‘한 달이면 며칠동안이나 산보를 하십니까’ 묻자, 나상윤은 ‘반달씩은 된다’면서 ‘우리 살림은 기분적이다’고 했다. 나상윤은 부부가 함께 산보하면서 종로의 찻집 ‘멕시코’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조지야 백화점, 미쓰코시 백화점에 가서 저녁도 먹는다고 답했다. ‘혼부라’는 모던 부부의 중요한 일상이었다. .

◇심훈의 ‘혼부라’, 채만식의 ‘혼산이’

종산이, 진산이는 문학 작품에 더러 등장했다. 채만식 단편소설 ‘종로의 주민’ 주인공인 영화감독 송영호는 매일같이 도심 산보를 즐겼다. 종로 네거리에서 광교를 지나 혼마치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메이지초 식당에서 덴푸라로 점심을 먹은 뒤 조지야 백화점을 지난 종로로 돌아오는 게 일과였다. 심훈이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 ‘영원의 미소’에도 혼부라가 등장한다.

‘”날두 이렇게 풀렸는데, 우리 혼부라(본정으로 산보한다는 말)나 좀 하고 들어가자꾸나”하고 백화점을 나오는 계숙의 외투 소매를 끌어당긴다.’

◇반나절 산보동행에 3원, ‘스틱걸’

산보에 동행하는 서비스로 돈을 버는 여성도 등장했다. 이른바 ‘스틱걸’. 이 신종 직업을 해설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한 시간에 일금 XX만 주면 사람과 장소를 묻지 않고 산보의 길 동무가 되어주는 직업 부인이 있다. 그들은 단장 모양으로 이 남자 저 남자의 팔에 걸려 다니는 까닭에 ‘스틱크껄’이라는 말이 생겼다.’(조선일보 1931년1월9일 ‘유행어’) 종로에서 본정(本町·혼마치)까지 한번 도는 데 정가는 3원이었다. 당시 여공 하루 일당이 60전이었으니 몇시간 길동무 해주고 닷새치 일당을 챙긴 셈이다.

◇안석주의 ‘모던 보이’ 비판

1920~1930년대 조선일보에 만문만화를 그린 석영 안석주는 나팔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모던 보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서양 영화를 본떠 유행을 따라가는 모습이 줏대없이 보였을 것이다.

‘해롤드 로이드의 대모테 안경이 조선의 젊은 사람의 유행이 되었고, ‘빠렌티노’의 귀밋머리 긴 살적이 조선 청년들의 뺨에다가 염소털을 붙여놓았고, ‘뻐스터 키ㅡ톤’의 젬병모자가 조선 청년의 머리에 쇠똥을 얹어 주었으며, 미국 서부활극에 나오는 ‘카ㅡ보이’의 가죽바지가 조선 청년에게 나팔바지를 입혀주었다.’ ‘그러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있는 조선의 거리에 그네들이 산보할 때에 그는 외국의 풍정(風情)인 듯이 느끼리라. 대체 그대들은 아무 볼일도 없이 길로 싸다니는 까닭을 모르겠다.’(조선일보 1928년2월7일 ‘모ㅡ던 뽀이의 산보’) 안석주는 파리 샹젤리제, 베를린 운터덴린덴, 런던 피커딜리, 뉴욕 브로드웨이 같은 데나 늙기전에 한번 가서 놀고 오라고 야유했다.

‘산보’의 자유는 근대가 안겨다준 선물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양갓집 부부가 함께, 또는 여성이 혼자 도심 거리를 다니며 구경할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1920년대 들어 모던 보이, 모던 걸은 양장(洋裝)에 중절모와 지팡이, 양산을 쓰고 거리를 쏘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서양 영화에서나 구경한 패션으로 차려입고 경성 도심을 쏘다니던 종산이, 진산이들은 100년 뒤 후손들이 K팝과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의 유행을 선도할 세상이 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

◇참고자료

신명직,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현실문화연구,2003

심훈, ‘영원의 미소’, 삼중당문고, 1975

蒼石生, ‘鍾散이, 진散이’, 별건곤 1927년2월

황호덕, 명동번창기 혹은 무지개 다리의 백일몽, 교수신문, 2012년5월9일,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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