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대장동의 5만원권

김홍수 논설위원 2021. 10. 16.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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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마이크로소프트 부사장이 재미 삼아 향수를 하나 만들었다. 달러 지폐 냄새를 담았다면서 이름을 ‘머니(money)’라고 지었다. 일본의 한 공장에서 환기구를 통해 돈 냄새를 주입했더니 생산성이 현격하게 올라갔다는 연구를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그는 “백만장자 냄새를 나게 해준다”는 광고를 내세워 실제 지폐를 갈아 넣었다는 이 향수를 병당 35달러에 팔았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하지만 낡은 지폐는 향기는커녕 악취를 풍긴다. 뇌물 현금 뭉치를 집에 보관했던 한 국회의원 부인은 “퀴퀴한 돈 냄새가 진동해 머리가 아파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헌 지폐의 악취는 세균 때문이다. 국내 한 미생물 전공 교수가 지폐 속 세균을 조사했더니 적혈구를 파괴하는 바실러스균, 폐렴을 유발하는 수도모나스균, 살모넬라균, 대장균 등 온갖 세균이 10종이나 검출됐다. 하루 종일 돈 세는 은행 직원들은 세균 탓에 호흡기 질환에 시달린다. 이 때문에 지폐 계수기 제조업체는 살균·탈취 기능을 넣었다는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는다.

▶검은 뭉칫돈을 숨겨야 하는 범죄꾼들에게도 돈 냄새는 골칫거리다. 그래서 땅에 파묻는 걸 선호한다. 1980년대 남미 마약 운반책 역할로 떼돈을 번 미국인 파일럿의 실화를 다룬 영화 ‘아메리칸 메이드’에선 주인공이 집 정원에 700만달러를 파묻었다. 반려견이 이를 파헤치는 통에 지폐가 사방에 흩날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 인터넷 불법 도박사이트로 떼돈을 번 일당이 현금 110억원을 김제 마늘밭에 묻었다가 적발됐다. 한 전직 대통령 아들은 뇌물로 받은 10만원권 헌 수표 1만장(10억원)을 아파트 베란다에 숨겼다 들통이 났다. 아마 냄새 때문에 그곳을 선택했을 것이다.

▶범죄자가 주로 활용하는 현찰은 최고액권이다. 2년 전 유로존 국가들은 최고액권 500유로 지폐가 탈세와 돈세탁에 주로 활용되자 사용을 금지했다. 우리나라에선 2009년 이후 250조원이나 발행된 5만원권이 계속 지하로 잠기고 있다. 올 1~8월 중엔 5만원권 환수율이 역대 최저인 19%대로 떨어졌다. 그런데 이 5만원권이 대장동 게이트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올봄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가 수십억원을 5만원권 현금으로 찾아가는 바람에 성남시 일대 은행 지점들이 5만원권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 수상히 여긴 금융정보분석원(FIU)이 지난 4월 경찰에 이 사실을 통보한 것이 이 사건의 공식 시발점이 됐다. 검은돈이 풍기는 악취를 따라가면 대장동 ‘그분’이 드러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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