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7년전 日서 발견된 고려 나전칠기가 리움 전시장에 나타난 사연은?

허윤희 기자 2021. 10. 16.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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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나전국화당초문 팔각합은 어떻게 삼성으로 갔나
지난 2014년 일본 아이치현 도자미술관 특별전 '고려·조선의 공예'에서 최초 공개된 '고려 나전 팔각합'. 높이 8.0cm, 폭 16.4cm. /아이치현 도자미술관 도록

지난 2014년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최상급 고려 나전칠기 작품이 일본에서 발견됐다. 흑칠(黑漆) 바탕에 자개로 국화당초무늬가 촘촘히 박힌 팔각합(盒·뚜껑이 있는 그릇). 아이치현 도자미술관은 특별전 ‘고려·조선의 공예’에서 이 나전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고려 14세기 후반 작품이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수작”이라고 소개했다<본지 2014년 10월 21일 자 A1~2면>.

이 국보급 나전칠기합이 70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2015년 말 일본인 소장가로부터 작품을 구입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지난 8일 재개관한 리움의 고미술 상설전을 통해서다. 4개 층을 전면 개편해 소장품 154점을 새로 펼친 상설전에서 ‘나전 팔각합’은 주목도가 가장 높은 1층 ‘국보장(欌)’에 놓였다. 높이 8.0㎝, 폭 16.4㎝. 잘게 썬 자개 조각을 치밀하게 엮은 국화 꽃잎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린다. 이승혜 리움 책임연구원은 “국보급만 전시하는 제일 좋은 자리”라며 “국보 ‘가야 금관’이 놓여있던 메인 진열장에 귀한 나전을 새로 모셨다”고 했다.

15일 오전 삼성미술관 리움 고미술 상설전 1층 전시장에서 한 관람객이 메인 진열장에 놓인 '나전 국화당초문 팔각합'을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어떻게 리움 품에 안겼나

7년 전 발견 당시 국내 학계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교한 자개 무늬가 돋보이는 수작”이라며 환호했다. 고려 나전칠기는 청자, 불화와 더불어 고려 미술을 대표하는 최상급 공예품이지만 실물이 워낙 귀해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16점만 확인됐다. 이 작품은 상태가 매우 좋은 데다, 유일한 팔각합 형태라 주목을 받았다. 본지 기사로 소식을 접한 상당수 전문가들이 일본 전시장을 찾아 실물을 관람했다고 한다.

문화재청 국외소재문화재재단도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현지 조사에 나섰던 것으로 확인됐다. 재단 관계자는 “일본인 소장가를 접촉하고, 국내 나전 관련 전문가들의 검토까지 거쳤으나 가격대가 워낙 높았고, 시대가 고려가 아닌 조선일 가능성도 제기돼 재단이 더 나서기엔 여러모로 부담이 있었다”고 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지난 2015년 말 일본인 소장가로부터 구입한 '나전 국화당초문 팔각합'의 뚜껑 윗부분. /삼성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리움이 지난 2015년 말 일본인 소장가로부터 구입한 '나전 국화당초문 팔각합'. /삼성미술관 리움

그런데 어떻게 이 작품이 리움에 왔을까. 리움 측은 “지난 2015년 열린 ‘세밀가귀(細密可貴)’ 특별전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했다. 당시 리움은 전 세계 흩어진 고려 나전 중 8점을 영국·미국·네덜란드·일본에서 빌려와 전시했고, 관람객들은 치밀하게 새겨 넣은 무늬와 환상적 빛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움 관계자는 “명품을 한 점 한 점 빌려와 한자리에 모으면서 고려 나전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 깨닫게 됐고, 소장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했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리움 측이 전시 준비 과정에서 이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됐고, 마침 일본인 소장가도 팔려는 의사가 있어서 구매가 성사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지난 2017년 일본인 소장가 도도로키 다카시(等等力孝志) 부부가 한국에 기증한 ‘분청사기 이선제(李先齊) 묘지’. 이번에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공개된 '나전 팔각합'도 도도로키씨가 소장하고 있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선제 묘지’ 기증한 그 일본인

흥미로운 건 이 일본인 소장가와 한국과의 인연이다. 지난 2017년 ‘분청사기 이선제(李先齊) 묘지’를 한국에 기증한 도도로키 다카시(1938~2016)가 그 주인공이다. ‘이선제 묘지’는 세종·문종 때 문신 이선제의 무덤에 묻혔던 부장품으로, 분청사기에 상감 기법으로 글씨를 새긴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행적을 적어 무덤에 묻는 돌이나 도판). 도굴된 뒤 1998년 일본으로 불법 반출됐고, 도도로키씨는 이 사실을 모르고 구입했다.

그런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조선일보 1998년 9월 2일 자 기사를 통해 ‘이선제 묘지’가 불법 반출됐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재단 관계자가 내민 기사를 본 부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한국에 기증한 것이다. 남편이 별세한 후 열린 기증식에서 아내 도도로키 구니에씨는 “이번 기증이 한·일 우호의 끈으로 남기를 기원한다”고 말해 감동을 줬다. 남편도 생전에 ‘이선제 묘지는 내가 가장 아끼는 미술품 중 하나지만, 조상을 섬기는 마음은 한국과 일본이 같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응천 이사장은 “별세한 도도로키씨는 다수의 한·일 미술품을 소장했던 유명 컬렉터”라며 “투병 중이던 그가 평생 아끼던 소장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리움과 연이 닿은 것 같다. ‘이선제 묘지’에 이어 귀한 나전 작품이 국내에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환영할 일”이라고 했다.

2017년 9월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분청사기 이선제 묘지'를 기증한 도도로키 구니에씨. 그는 "이번 기증이 한일 우호의 끈으로 남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DB

◇형태뿐 아니라 디테일 독특

고려 나전칠기는 당대에 이미 명성을 떨쳤다.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 “고려의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 “극정교(極精巧)”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전문가들은 ①아주 잘게 썬 자개 조각을 조합해 엮은 치밀한 무늬 ②금속선 두 줄을 꼬아 외곽선을 장식한 고난도 기법 ③대모(바다거북 등딱지)의 뒷면을 채색한 뒤 기물 표면에 붙여 붉은빛·주황빛·노란빛이 환상적으로 빛나는 기술은 중국·일본에는 없는 고려만의 것이라고 이유를 꼽는다.

이번 작품은 국화와 당초무늬가 뚜껑과 몸체를 빼곡히 채웠고, 넝쿨무늬 이파리가 곡선을 이루며 출렁거린다. 뚜껑과 몸체의 각진 부분에는 가느다란 금속선 두 줄을 입혔다. 그런데 팔각합이라는 독특한 형태뿐 아니라 세부 묘사에서도 특이한 점이 있다. 이용희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나전을 오리는 가공 방법과 문양은 전형적인 고려 양식”이라면서도 “보통 고려 나전은 외곽선에 금속선 두 줄을 꼬아서 넣는데 이 작품에선 그게 안 보인다”고 했다. 이광배 리움 책임연구원도 “두 줄을 꼬아서 넣은 금속선 대신 일(一)자 금속선으로 마감했다. 꽃과 꽃을 연결하는 가지 역시 금속선이 아니라 얇은 나전으로 잘라 붙인 것도 색다르다”고 했다.

리움이 이 작품을 ‘고려 나전’으로 못 박지 않고, ‘고려 말~조선 초(14~15세기)’라고 범위를 확대한 이유다. 리움 측은 “14세기 고려 말 작품이라고 보지만, 조선에 걸쳐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범위를 열어놨다”고 했다. 7년 전 아이치현 도자미술관은 ‘고려 14세기 후반’이라고 소개하면서 도록 설명에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로 가는 과도기 모습을 보여준다”고 붙인 바 있다.

지난 2014년 일본 아이치현 도자미술관 특별전 도록에 실린 '나전 팔각합'. 뚜껑과 몸체를 분리해 속살이 드러난 모습이다. /아이치현 도자미술관 도록

이로써 한국은 온전한 형태의 고려 나전칠기 작품을 4점 보유하게 됐다. 지난해에는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또 다른 일본 개인 컬렉터에게서 구입한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을 공개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용희 전 부장은 “삼성 측이 지난 4월 이건희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해 온 국민이 향유할 수 있게 된 데 이어, 리움미술관이 일본에서 발견된 귀한 나전까지 고국에 들여왔다고 하니 마음이 놓인다”며 “해외로 반출된 국보급 유물이 돌아왔다는 점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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