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조용히 茶마시는 남자를 자극한 마피아의 최후

이용재 음식평론가 2021. 10. 1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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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더 이퀄라이저'

새벽 2시 13분, 잠 못 이루는 남자는 냅킨에 티백 하나를 싸 셔츠 앞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선다. 손에는 양장판 ‘노인과 바다’가 들려 있다. 행선지는 집 앞 다이너. 정해진 움직임에 따라 식탁의 포크와 나이프, 냅킨을 치우고 나면 백발의 요리사가 뜨거운 물주전자를 들고 나타난다. 남자가 티백을 꺼내 머그잔에 담으면 요리사가 물을 부어준다. 둘의 주고받는 움직임이 이미 오랜 세월 익숙한 사이 같다.

그렇게 남자는 따뜻한 차를 놓고 책을 읽는다. 다이너 창문 밖에서 그의 모습을 비추는 장면이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호크스’(1942년)를 닮았다. ‘의도는 안 했지만 아마 무의식적으로 큰 도시의 외로움을 그렸다’고 호퍼가 말했던가. 남자와 보스턴 밤거리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영화 '더 이퀄라이저'에서 주인공들이 다이너에서 대화하는 장면. /컬럼비아 픽처스

하지만 영화 속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어느 밤, 남자는 역시 다이너의 단골인 십대 윤락녀 알리나(클로이 모레츠)와 대화를 나눈다. 그가 가수 지망생이라는 걸 알고 격려해주는 등 우정을 쌓는 가운데, 눈앞에서 알리나가 러시아 깡패 기둥서방에게 구타당한다. 고민 끝에 남자는 현금 9800달러(약 1200만원)를 싸 들고 깡패의 본거지를 찾아가 알리나를 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기둥서방이 코웃음 치며 거절하자 남자는 방문을 잠그고 고작 29초 만에 총으로 무장한 5명의 깡패를 거의 맨손으로 처치한다. 그렇다. 남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 전 가짜 죽음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은퇴해 조용히 사는 특수 요원 로버트 맥콜(덴젤 워싱턴)이었다.

하지만 그가 처치한 깡패들도 그냥 동네 건달은 아니었다. 석유부터 마약, 매춘에 등 온갖 불법 사업을 벌이는 러시안 마피아 푸시킨의 지역 담당책이었다. 한 가닥을 뽑으면 우수수 딸려 나오는 잔디 뿌리처럼 러시아의 엘리트 살인범들이 목숨을 노리기 시작한다. 맥콜은 본의 아니게 은퇴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실력 발휘에 나선다.

폭력에 혈혈단신으로 맞서는 이야기 ‘더 이퀄라이저’는 잘 차린 폭력의 코스 요리 같다. 때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잔혹하지만 맥콜이 다이너에서 누렸던 평화가 아이러니하게도 완충 작용을 해준다. 건달들이 사랑하는 개를 죽였기 때문에 존 윅이 세 편에 걸쳐 살인을 저지르고 다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았으니 적어도 영화 속 세계에서는 응징을 받아도 싸다.

미국의 다이너는 1872년 월터 스콧이 음식을 싣고 팔았던 수레에서 비롯돼 기차의 식당칸을 닮은 건물로 발전했다. 그래서 유선형 둥근 천장에 아르데코 양식의 인테리어를 갖춘 공간이었다가 점차 ‘나이트호크스’와 ‘더 이퀄라이저’의 공간처럼 건물에 자리 잡았다. 현재는 온갖 양식의 다이너가 혼재하는 가운데, 대부분이 24시간 영업하며 심야와 새벽의 영혼과 육신의 허기를 채워준다. 그리스나 폴란드를 위시한 동유럽 국가 이민자들이 자국의 음식 문화를 미국에 정착시키는 본거지로 삼았다는 점도 다이너 문화의 특색이다.

정착 과정을 보면 한국의 다이너는 실내 포차다. ‘포장’을 친 ‘마차(수레)’라는 이동식 음식점이 같은 메뉴를 실내에 입주해 팔기 시작하면서 ‘실내 포차’가 됐다. 요즘의 포차는 아예 ‘실내’의 딱지마저 떨군 채로 다이너의 본고장인 미국에 진출할 정도의 입지를 갖췄다.

포차와 달리 대부분의 다이너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주류 면허 취득이 까다로워서다. 대신 햄버거부터 클럽 샌드위치를 비롯, 온갖 파이와 케이크 등 디저트까지 실로 다양한 메뉴를 자랑한다. 온갖 식사 메뉴를 취급한다는 점에서 ‘김밥천국’을 위시한 분식집과 다이너가 닮은 구석이 있다.

맥콜이 엉겁결에 시작한 범죄의 잔디 뿌리 뽑기는 결국 러시아에서 우두머리인 푸시킨을 처치하고서야 끝이 난다. 평화를 되찾은 그는 이제 다이너에 노트북을 들고 앉아, 인터넷으로 접수해 어려운 이들을 돕는 자경단 노릇을 시작한다. 영화 속 장소와 같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국내에서는 햄버거 가게 ‘브루클린 버거 조인트’가 태동 초기 화려한 다이너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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