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인문정원] 미래는 '게으름'에 있다

- 입력 2021. 10. 15.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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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작가 '사강의 말'에 의표 찔려
나태함 아닌 '무위'의 가치 강조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을 구분하는 세 차원이고, 우리는 그 세 차원을 거머쥐고 살지만 초점은 늘 현재에 맞춰진다. 우리는 현재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이다. 저 멀어진 육지는 우리가 떠나온 과거라는 시간이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저 너머의 대륙이 미래이다. 우리는 그 미지의 시간을 설레며 기다린다. 현재는 고통과 쾌락으로 비벼지고, 유혹과 공포가 함께하며, ‘나’를 발명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현재라는 찰나에 시간을 찢고 나온다.

삶이 고단할 때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그 고단함을 견뎌낸다. 오늘은 힘들지만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나아질 거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즐거운 날이 오리니”라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구에서 한 줌의 위로를 얻는다. 그 마음의 한쪽에 “마음은 미래에 살고/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지나간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란 믿음이 있다. 로버트 그루딘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미래는 다락과 같다. 서까래만 있고 가구는 없이, 미뤄둔 의무와 토막 나버린 꿈들로 가득한 공간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미래를 의무가 유예된 추상이자 토막 난 꿈들로 가득한 상상으로만 겪는다.
장석주 시인
우리는 시차를 두고 기억과 분별력으로 과거를 빚는다. 과거는 현재를 만드는 상수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과잉이 밀어낸 현재의 다른 이름이다. 미래는 오직 우리 기대수명 속에 있다. 그것은 형태가 부여되지 않은 미정형의 시간이고, 곧 태어날 아들이며, 내일 필 꽃과 함께 오는 새 계절이고, 영원히 쥐어지지 않을 무한이다. 어떤 미래는 우리를 장밋빛 전망으로 이끈다. 강력한 희망의 근거라는 점에서 미래는 ‘눈에 띄지 않는 경이’이고 우아한 절망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연결되는 연속체다. 현재는 과거를 이루었던 성분을 포함하고, 따라서 과거가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미래와 차단된 완전한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미 현재 속에 미래의 성분이 균질하지 않은 상태로 와 있다. 현재는 과거의 확장이고, 미래의 축소로 비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과거란 파티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잔해물이 여기저기 나뒹구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치우고 정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과거는 덧없이 흘러간 시간, 낭비된 시간, 후회와 회한의 덩어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현재를 지나가 버린 과거를 설거지하고 청산을 하는 데 써버린다. 과거에 몰두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퇴행이다. 현재는 현재로서 빛나야만 한다. 현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매달릴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급류다.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미처 수습할 수도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붙잡아라!

야마구치 미치코가 쓴 ‘사강의 말’을 읽다가 “미래는 ‘게으름’에 있다”란 문장 앞에서 좀 놀랐다. 그 말이 의표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게으름이 반(反)노동이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태업의 시간이란 점에서 게으름에 대한 세간의 시각이 곱지만은 않다. 그런데 미래가 ‘게으름’에 있다니! 이 문장은 “저는 언제나 게으름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게으름은 소중하죠. 책은 보통 시간을 낭비하면서 완성되니까요”라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말에서 유추된 것이다.

사강이 말한 게으름이란 무위에 가깝다. 게으름은 무위와 닮았다. 마땅히 할 일을 팽개치고 농땡이 치는 것, 다만 빈둥거림이 아닌 점에서 무위는 게으름의 나태함에서 비켜난다. 무위란 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지 않음에 부지런함이다. 차라리 무위란 피동성을 삼켜버린 능동성이다. 노자나 장자 같은 동양 철학자들은 이 능동성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게으름이나 무위란 중요한 착상과 발견을 위한 필요조건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게으름’ 속에서 그 밀도가 높아지고 무르익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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