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훤의 왈家왈不] '대장동 게이트'가 고마운 이유

전태훤 선임기자 2021. 10. 1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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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건은 일반인도 전문가로 만들어 놓는다.

2005년 이른바 ‘황우석 사태’는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생명과학 지식 수준을 어마하게 끌어올린 계기가 됐다. 황우석 전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1999년 젖소 복제에 성공하며 대중 앞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동물 복제로는 영국 에든버러 대학 연구팀의 복제 양 돌리보다 3년 늦었지만 국내 기술로 소를 처음 복제했다는 것만으로도 생명과학계는 물론 나라 전체가 들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사람의 난자로부터 환자 맞춤형 체세포를 복제한 배아줄기세포를 세계 최초로 추출했다는 황 전 교수의 사이언스지 논문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관련된 이슈는 어느 자리에서건 화젯거리였다. 지금 들어도 일반인에겐 생소하기만 한 줄기세포며 체세포 복제 기술이란 말이 그때처럼 많이 대중의 입을 타고 오르내린 적은 없지 싶다.

생각지도 못했던 코로나 역병도 그랬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은 지 2년이 가까워지고 온갖 백신 음모론까지 퍼지는 사이에 주변엔 비공인 백신∙방역 전문가들도 늘었다. ‘이런 사람에겐 이런 백신이 더 효과적이다’거나, K-방역이 이렇네 저렇네 하며 훈수를 두기도 한다. ‘자칭’ 코로나 전문가들이다.

요즘 같아선 모두의 부동산 개발 지식이 웬만한 디벨로퍼급이 돼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 전국을 뒤흔들고 있는 이른바 ‘대장동 게이트’는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도시개발사업의 복합한 얼개를 일반인들도 깨우칠 수 있게 만든 살아있는 ‘교과서’가 됐다. 민관공동개발을 할 땐 시행을 맡을 별도의 출자법인(PFV)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같은 주주로 참여하더라도 지분율에 비례하지 않고 배당 방식에 따라 배당금이 천지 차이로 벌어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민관공동개발에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악마의 기술’이 숨어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했으니 수준급이라 할 수도 있겠다. 지자체의 참여로 토지를 헐값에 강제로 수용하더라도 민간이 하는 개발이라 분양가상한제를 피할 수 있으니, 덜 쓰고 더 버는, 그야말로 개발이익을 몇 배로 더 튀길 수 있는 설계 구조다. 말이 좋아 민관공동개발이지,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선도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고마운’ 참고서다.

공공주택지구 전국연대 대책협의회(공전협) 관계자들이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대장지구에서 대장동 게이트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쨌거나 대장동 의혹의 몸통이나 정치권과 개발업자 간 부정한 로비·청탁과 대가성 뇌물로 보이는 수상한 돈의 흐름, 수천억원대 개발이익을 둘러싼 특혜 의혹 등은 사정 당국의 조사를 통해 밝혀내고 그에 합당한 법의 처벌이 따르면 될 일이다.

그런 면에서 대장동 게이트는 대한민국 국토개발사에 남을 흑역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겠지만, 이와 유사한 사태를 예방할 타산지석이 됐다는 점에선 불행 중 다행이지 싶다.

행정안전부 지방공공기관 통합 공시 사이트 ‘클린아이’에 따르면 올해 6월말 현재 31개 경기도 시·군 가운데 대장동 프로젝트를 추진한 성남도시개발공사와 같이 자체 도시공사를 둔 곳은 모두 21곳이다. 이들 공사는 토지수용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100% 공영개발이 아닌 이상, 제2의 대장동 사태는 얼마든지 나올 여지가 있다.

이미 1조원대 안양시 ‘박달 스마트밸리 사업’과 아파트 1300가구를 짓는 포천시 ‘내촌면 내리 도시개발사업’, 1조3000억원 규모의 평택 ‘현덕지구 도시개발사업’ 등은 대장동 프로젝트처럼 모두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해 민관합동개발로 추진되고 있다.

특히 안양·포천시 도시개발사업에는 각각 천화동인 4호 소유자와 대장동 인허가에 개입했던 성남도시개발공사 출신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일자 안양시는 박달 스마트밸리 개발사업의 민간 사업자 공모를 돌연 취소하기도 했다.

대장동 사태 이후 민관합동개발의 경우 이와 유사한 민간 특혜 의혹이 생길 여지가 크다고 보는 만큼 민간 사업자의 초과이익을 환수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민관공동개발의 탈을 쓴 ‘검은 설계’의 추악한 이면을 보고서야 손을 쓰는 모양새가 됐지만, 이제 이 바닥을 훤히 알게 된 이도, 지켜보는 이들도 생겼으니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모르고 넘어갔으면 어땠을까? 그 뒤에 숨은 ‘검은 손’의 기술자들과 결탁한 세력들이 전국 곳곳에서 얼마나 더 배를 채웠을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고친 외양간이 고치지 않은 것보다는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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