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예술이 변하니?[이승재의 무비홀릭]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2021. 10. 1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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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는 은퇴한 제임스 본드를 대신해 새로운 007이 임명된다. 바로 흑인 여성.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007이 필요하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 이 글엔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최근 개봉한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보고 두 번 놀랐어요. 우선은 제목 그대로 ‘죽을 시간이 없을’ 만큼 제임스 본드가 임무 수행에만 일로매진하는 모습이 낯설어 놀랐어요. 원래가 본드는 개미처럼 일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국민 혈세로 먹고사는 공무원이란 본분을 망각하고 금수저 프리랜서처럼 구는 게 그의 매력이자 아이덴티티이지요. 자유진영 수호와 자유연애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하이브리드형 능력자이기도 하고요. 근데, 이번 영화에서 본드는 친자식까지 둔 애처가 일편단심이라 도무지 적응이 안 되어요. 두 번째로 또 놀란 이유는, 제목에선 ‘죽을 시간이 없다’고 해놓고선 본드가 극중에서 진짜로 죽어버리기 때문이에요. 007은 원래 안 죽는 거 아닌가 말이에요!

[2] 007의 놀라운 변화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면 되어요. 미소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주적(主敵)을 상실해 버린 007은 한때 길 잃은 어린 양처럼 배회하였어요. 비현실적인 액션과 로맨스는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냉엄한 세상 트렌드에 더 이상 맞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네 전파상 아저씨 같은 얼굴의 배우 맷 데이먼이 유니클로 비슷한 옷을 입은 채 ‘내 안의 적’을 찾아 헤매는 뉴웨이브 첩보물 ‘본’ 시리즈가 등장하면서 007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이르렀지요. 이에 007은 혁신을 꾀하였어요. 전통적이고 도회적인 미남이 아닌, 테스토스테론 냄새 풀풀 풍기는 근육질 배관공 이미지의 대니얼 크레이그를 뉴 본드로 낙점하면서 땀내 나는 첩보원으로의 변신을 도모하였고, 이번엔 그를 아예 죽여버리기까지 하지요. 심지어 이번 편엔 본드가 잠깐 은퇴한 사이 공석이 된 007에 새로운 인물이 임명되는데, 뉴 007이 다름 아닌 흑인여성으로 설정된 사실만 보더라도 ‘정치적 올바름’까지 챙기는 007 시리즈의 상전벽해를 실감할 수가 있지요.

[3] 맞아요. 변해야 살아요. 먹고살려면 변해야 해요. 청룽(성룡)을 보세요. 과거 홍콩에서 그러했듯, 더 큰 시장 할리우드로 진출해서도 여전히 바보 같은 웃음에다 허허실실 액션으로 떼돈을 벌었잖아요? 하지만 지난달 개봉한 마블의 새로운 히어로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통해 목격한 명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의 변신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좀 자존심이 상했어요. 물론 그가 노리개 취급을 당한 건 아니에요. 나름의 사연을 지닌 악당으론 나오지만, 할리우드가 동양배우에게 원하는 딱 그 수준 이상으론 한 치도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상업적으로 디자인된 전형적 인물을 연기하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이 새삼 서글펐다고요. 이젠 ‘비정성시’와 ‘중경삼림’과 ‘해피 투게더’와 ‘무간도’의 지독히 쓸쓸한 량차오웨이는 볼 수 없는 걸까요? ‘화양연화’에서 앙코르와트 성곽 구멍에다 자신의 비밀을 속삭이곤 영원히 봉인하던, 치명적으로 외로운 량차오웨이는 더 이상 없는 걸까요?

[4] ‘홍콩’이 사라지면서 어쩌면 우린 진짜 량차오웨이도 잃고, 진짜 저우룬파(주윤발)도 잃어버렸을지 몰라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홍콩의 영화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영화로 만들었어요. 그것이 ‘영웅본색’ ‘첩혈쌍웅’으로 대표되는 홍콩 누아르이지요. 생존에 대한 의심, 살아가는 순간마다 숙명적으로 느껴지는 우울감에 사무치는 자신들을 구원해줄 영웅을 원했고, 홍콩인들의 이런 염원은 트렌치코트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채 의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동양적 슈퍼히어로의 탄생으로 이어졌지요.

[5] 하지만, 변해도 너무 변했어요. ‘영웅본색’을 제작한 홍콩 누아르의 기수 쉬커(서극) 감독은 얼마 전 6·25전쟁의 장진호 전투를 ‘항미원조’의 중국 시각으로 다룬 언필칭 애국영화 ‘장진호’의 공동연출자로 이름을 올렸어요. 그것도 ‘패왕별희’의 천카이거 감독과 함께요. ‘붉은 수수밭’ ‘홍등’ ‘국두’ 같은 문제작을 통해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중국 주류문화를 비판해온 장이머우(장예모) 감독도 ‘영웅’이란 무협물을 통해 ‘하나의 중국’을 외치며 표변하더니, 지난 베이징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으면서 인민의 영웅으로 등극했지요.

[6] 한국 최고의 멜로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셨는지요? 유지태는 지질하게 말해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요. 사랑은 안 변해요. 사람이 변하죠.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예술이 변하니? 예술은 안 변해요. 사람이 변할 뿐이죠. 자유를 개한테나 줘버린 예술가는 그냥 사람일 뿐이에요. 돈 잘 버는 사람요. 부디, 화천대유하시길.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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