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그림 속에 담긴 선조들의 염원과 희로애락

김예진 2021. 10.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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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도, 현대를 만나다'
'효·제·충·신·예·의·염·치' 덕목 글 속에
글자 의미 관련 상징적 형상 그려 넣어
유교덕목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
점차 장식화 경향.. 생활미술로 자리
"작가의 불가사의한 표현 가득한 민화"
현대미술가 3인의 문자도도 함께 전시
전시전경. 현대화랑 제공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조선이 꿈꾼 유교적 이상사회를 떠받친 윤리다. 하지만 이 윤리는 단지 사회의 윤리기준에 머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계층을 아울러 당대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숨 쉰 ‘생활미술’이 됐다. 이 여덟 글자를 한국만의 개성 있는 향토예술작품으로 들여다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위치한 현대화랑이 전시 ‘문자도-현대를 만나다’를 개최하며 조선시대 문자도 11점을 선보인다. 문자도를 새롭게 재해석한 현대미술가 박방영, 손동현, 신제현의 작품도 함께 내놓았다. 현대화랑이 그간 저평가돼온 한국 민화를 재조명하기 위한 취지로, 2018년 개최한 기획전 ‘민화, 현대를 만나다’의 후속 전시다. 이번엔 문자도를 조선시대 선조들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당대 사람들의 염원과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집중 조명한다.

문자도란 여덟 글자에 그 의미와 관련된 이야기나 대표 상징물을 그려넣고 수복강녕의 의미를 새겨넣어 교훈을 전하는 그림이다. 조선 말기에 시작돼 1970년대까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그림이다. 문자도 중에는 한자를 소재로 한 효제도가 다수를 차지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화 가운데서도 문자도, 문자도 가운데서도 유교 덕목인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여덟 글자를 그린 문자도를 모아 선보인다. 문자도는 18세기 성행하기 시작해, 19세기 후반에는 장식화 경향이 강해지며 조선시대 생활미술을 대표하는 장르가 됐다. 유교 윤리를 대중에 설파하기 위해 제작됐지만, 점차 전국 방방곡곡에서 고유의 지역색과 결합해 예술작품으로 변해간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백수백복도’가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복(福)자와 수(壽)자를 번걸아 100번 반복돼 있는 구성인 작품이다. 오래 살고 복을 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민화 특성상 대부분 작자미상인 작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시기와 작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작품이다. 1894년을 뜻하는 ‘갑오춘서’라는 표기와 ‘조선의주에 사는 장인선’이라는 제작자가 남아 있다. 문자도가 유행한 시기를 관람객에게 안내하기 위한 친절한 시작점으로 삼았다.
19세기 후반 문자도. 현대화랑 제공
상형문자인 한자의 반복은 ‘그림과 글은 본래 하나였다’는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한자 중에서도 당대 염원이 담긴 두 글자의 반복이 하나의 패턴이 된 추상작품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다양한 파스텔톤 색채로 한껏 멋을 부린 듯한 모습에서는 당대를 살았던 이들이 이 문자도를 통해 빌었을 간절한 마음과 정성이 전해진다.
손동현 ‘스칼렛 크림슨(SCARLET CRIMSON)’. 현대화랑 제공
이어지는 작자미상의 문자도들은 ‘효제충신예의염치’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광경이다. 그 가운데서도 곧고 모던한 분위기의 서체에 꽃들이 수놓인 듯한 작품은 이 전시에서 기획자가 수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19세기 후반 제작된 8폭 병풍의 문자도로, 문자는 모던한 감각을 보여주고 문자 내부에는 모란과 연꽃, 국화, 매화, 해당화 등 전통 꽃그림의 대표 상징들이 표현돼 있어 유교 윤리를 아름답게 재구성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외에도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연상시키기 위해 글자의 일부 획 대신 굽은 새우를 그려넣은 ‘충’자, 가로획 하나를 잉어로 대체한 ‘효’자 등이 있다. 글자가 가지는 이미지, 또는 관련 고사나 설화를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 특유의 묘미를 뽐낸다.
신제현 ‘문자경’. 현대화랑 제공
전시에서는 전국에 확산한 문자도 가운데서도 제주도의 문자도만 따로 떼어 조명하는 순서가 마련돼 있다. 제주문자도는 그 자체로 ‘효제충신예의염치’를 소재로 한 문자도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자, 문자도가 지역 특유의 토속적 문화가 결합돼 얼마나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제작됐는지를 보여주는 장이다. 제주문자도들은 각 화폭마다 하늘, 섬(땅), 바다를 표현하려는 듯 3단으로 구획돼 있는 구성이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경쟁적으로 개성을 개발해 나간 열정이 전해진다.

정병모 경주대 특임교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쓴 글에서 “조선시대 유교 문자도의 의미있는 가치는 구조적 짜임과 자유로운 상상력에 있다”며 “문자도라는 유산을 단순히 옛 그림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현대에 어떻게 계승해 미국의 그라피티 못지않은 현대의 문자도로 발전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지적에 반응하듯, 현대미술가 3인이 나름의 색깔로 문자도에 어우려져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국 미술의 뿌리와 DNA를 찾고 탐구하려는 시도로 문화유산과 현대미술을 함께 배치하는 전시가 부쩍 눈에 띄는 가운데 마주하는 반가운 장면이다.
박방영 ‘인연’. 현대화랑 제공
문자도는 장르의 태생부터 저물기까지, 근대의 징조를 엿볼 수 있다. 지배계층이 교화를 목적으로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데서 시작됐고, 신분질서가 점차 허물어지던 시기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병풍 문화와 함께 하위계층으로 확산된 일종의 문화자본이라는 점에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안현정 미술평론가는 “이름 없는 무명화가들의 그림이라는 편견 때문에 이 빼어난 그림들이 한동안 인정받지 못했으나, 문자도는 그린 이의 상상력에 따라 신출귀몰하고 불가사의한 표현이 가득한 민화”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한 것에서부터 대상을 생략하거나 과장한 것에 이르끼까지 표현이 풍부하다”며 “비주류 미술사로 취급받던 민화를 독창적 개성미로 읽어냄으로써 근대의 한 측면을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31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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