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칼럼] 앨버트로스를 기다리며

한겨레 2021. 10. 1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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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칼럼]월레 소잉카를 다시 본 것은 한참 후 뉴스에서였다. "인종주의자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살 수 없다"며 미국 영주권을 찢어버리고 트럼프 취임 전에 내전과 군부독재 시절 감옥에 갇혔던 고향 나이지리아로 돌아가는 그를 세계 뉴스가 일제히 보도한 날이었다. 티브이에서 웃음 잃은 시인을 보며 반가움과 슬픔과 오싹한 지성의 힘을 느꼈다.

문정희|시인

“기도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 이런 시구를 떠올리며 깊어가는 가을 길을 걷는다.

바람에 떨어져 나뒹구는 가을 잎이 누군가 떨어뜨린 마스크로 보인다.

우리가 사는 지구별은 뜻하지 않은 전염병에 여전히 쫓기고 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고 정치 뉴스는 갈수록 뻔뻔해지고 있다.

이 가을, 외로움과 우울이 더욱 깊어가는 것은 코로나와 함께 사회 전반에 걸친 가치 혼란과 부정한 현실 때문인 것 같다. 전염병이나 기후변화, 자연 파괴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 또한 한없이 천박해지고 거칠어졌다는 것을 자주 실감하게 된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을 제시하고 그 가치를 일깨워 줄 지성의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바닷새 앨버트로스의 모습을 보았다. 신천옹이라는 신비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새가 먹이인 줄 알고 쪼아 먹은 플라스틱 파편을 가슴에 가득 채우고 죽어 널브러진 사진이었다. 그렇게 죽어간 새가 앨버트로스를 포함하여 1년에 100만마리가 넘는다고 하니 참담하다.

앨버트로스는 갑각류, 어류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바다 위에서 먹이인 줄 알고 쪼아 먹고 새끼들에게도 먹인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단추, 병뚜껑, 칫솔, 낚싯줄 등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날개를 가진 새, 가장 멀리 가장 높게 날기 때문에 하늘의 왕자라고도 불리는 새가 아닌가. 이 새의 가슴에 가득한 죽음의 플라스틱 파편들은 그래서 더욱 슬픈 상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환경 사진가 크리스 조던의 <앨버트로스>가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생태학적인 심각성과 동시에 우리의 가슴과 정신에도 저렇듯 반생명적인 플라스틱 파편이 가득 쌓여 있다는 경고와 각성이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비조인 보들레르는 유명한 시 ‘악의 꽃’에서 앨버트로스를 시인 자신의 상징으로 노래했다. 유난히 큰 날개 때문에 이상향의 세계인 하늘을 날기에는 어울리지만 현실인 땅에 내려오면 그 크고 긴 날개가 거추장스러워 뒤뚱거리는 바보 새가 즉 시인인 것이다.

한세기 전 프랑스의 시 ‘악의 꽃’ 속에서 뱃전에 떨어져 선원들의 조롱을 받던 시인 앨버트로스가 이윽고 이 시대의 오염된 바다에 떠다니는 가짜 먹이인 플라스틱을 먹고 죽어 널브러진 것 같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사진 속 앨버트로스의 가슴에 쌓인 플라스틱은 우리가 탐닉한 욕망과 거짓의 파편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오염된 정신에 드리운 죽음과 파괴의 상징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오랜만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앨버트로스가 큰 날개를 펼치고 날았던 저 꿈과 이상의 하늘에는 맑고 소슬한 가을이 출렁이고 있었다. 순수하고 자유롭고 오염되지 않은 꿈꾸는 날개가 그리웠다. 현실에서 약삭빠르지 못하고 불편한, 그래서 멋진 앨버트로스의 출현이 더욱 기다려졌다.

어느 해 늦은 여름이었던가. 세계적인 작가 30여명이 우리나라에 초청되어 온 적이 있다. 그분들과 한국 작가들이 함께 5일 동안 토론도 하고 시 낭송도 하고 금강산에도 같이 갔다. 피부도 언어도 달랐지만 이상을 노래하고 불의와 부자유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금방 가까워졌다.

그때 만난 흰머리와 수염이 인상적인 나이지리아의 작가 월레 소잉카를 나는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꿈을 언어로 풀어놓은 작가라는 평과 함께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지만 그보다 그는 어떤 두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작가였다. 정부와 측근들의 배를 채우는 석유 사업과 도처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비판을 하고 가차 없이 맞선 시인이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옥수수 한개를 사서 반으로 갈라 먹으며 서로를 옥수수 패밀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때 반으로 나뉜 옥수수는 남과 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축배의 잔을 치켜들듯 반쪽 옥수수를 다시 하나로 맞대어 보며 뜻있는 웃음을 주고받은 기억이 선명하다.

월레 소잉카를 다시 본 것은 한참 후 <시엔엔>(CNN) 뉴스에서였다. “인종주의자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살 수 없다”며 미국 영주권을 찢어버리고 트럼프 취임 전에 내전과 군부독재 시절 감옥에 갇혔던 고향 나이지리아로 돌아가는 그를 세계 뉴스가 일제히 보도한 날이었다.

나는 티브이에서 웃음 잃은 시인을 보며 반가움과 슬픔과 오싹한 지성의 힘을 느꼈다. 결국 문학의 힘은 실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천의 방법은 침묵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고 몸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제대로 길을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될 것 같았다.

“정의와 부정에 대한 의식이 없는 작가는 작품을 쓰기보다 아이들을 위한 졸업사진첩을 편집하는 쪽이 더 어울린다”고 한 사람은 헤밍웨이였다.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천황이 주는 훈장을 거부한 것도 가슴 철렁하도록 감동적인 모습이다. 그는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막는 헌법과 교육 기본법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천황의 훈장을 거부했다. 평생을 보장하는 거액의 연금이 주어지는데다 어린 시절부터 천황을 신으로 받드는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그의 집 앞에 극우파들이 몰려와 “당신은 일본인이 아니다”라며 극렬한 시위를 벌이는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반전의 신념을 지킨 진정 자유로운 거장의 모습이었다.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어설픈 삶을 살아오면서 자주 침묵으로 무사함을 택하고 살았음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계절이다.

겨우 용기를 내어 위험을 무릅쓰고 의견을 표명한 적도 몇번 있기는 하지만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따돌림과 모난 돌로서의 위험과 불이익을 피하며 언뜻 지혜로워 보이는 처신을 유지한 것이다. 가슴속에 가짜 먹이인 플라스틱을 가득 채우고 죽은 앨버트로스를 보며 섬뜩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나의 부끄러움과 자책이 겹쳐진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누구보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정확하게 보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작가는 무수한 거짓, 무수한 허명, 유혹과 두려움, 기회주의와 비겁함 그러니까 생명이 없는 가짜 가치, 즉 오염된 바다에 널려 있는 플라스틱 파편들과의 치열한 싸움을 기록하는 기록자인지도 모른다.

이 가을, 노벨상은 또 한국을 지나갔다. 그 상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그보다 새로운 세계를 가진 자유로운 작가, 무사함과 기득권과 침묵의 카르텔에 숨지 않은 진정한 지성의 목소리가 더욱 기다려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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