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둘러 오는 사람

한겨레 2021. 10. 1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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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재작년부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이따금 옛 회사 동료들을 만나면 모두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오늘의 내 마음을 정확히 기술하자면 단순히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가 아니라, '오랜 직장 생활 끝에 맞이하게 된 프리랜서의 삶에 만족한다'라고 할 수 있겠다.

프리랜서의 삶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오랜 직장 생활을 해봤기 때문이고, 새로 산 의자가 만족스러운 건 금세 허리가 아파오던 싸구려 의자를 오래도록 써본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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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삶의 창] 홍인혜 |시인

십수년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재작년부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이따금 옛 회사 동료들을 만나면 모두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닌 게 거울을 보면 내가 보기에도 격무에 시달리던 시절보다 한결 편안해 보인다. 사회생활에 특화되었던 표정근은 진작 풀어졌고, 피부 저 깊은 곳에서 퇴사 광이 은은하게 감돈다. 동료들은 묻는다. ‘그렇게 좋아? 그래도 회사를 15년 넘게 다녔는데 집에 있는 게 어색하진 않아?’

놀랍게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마치 태곳적부터 이렇게 살아온 사람처럼 퇴사 다음날 바로 적응했다. 아니 솔직히 이건 적응조차 필요 없는, 인간의 천성에 가까운 삶이다. 이처럼 프리랜서의 삶에 100% 만족하는지라 이런 생각도 들었다. 좀 더 빨리 회사를 그만뒀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았다면?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스스로를 꾸짖는다. 아니, 그건 아니지. 지금의 자유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건 지난 십수년의 조직 생활 덕이다.

요즘 나는 모닝콜 없이 열린 창으로 스미는 햇살에 자연스레 눈을 뜬다. 급히 가야 할 곳이 없어 느긋이 일어나면 조바심이라곤 사라진 아침이 아직도 만족스럽다. 학창 시절 이래 지난 수십년 나의 아침은 모닝콜에 산산조각 나곤 했으니까. 그렇다고 여유만 즐기며 살진 않는다. 생업은 소중하기에 많은 일을 의뢰받고 부지런히 해치우고 있다. 이따금 업무에 소홀해지거나 태만해지려고 하면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1인 기업체이고 나의 팀장도 나, 나의 팀원도 나라고. 내가 허튼 결정을 하는 순간 나는 무능한 팀장과 일하는 셈이 되고, 내가 게을러지는 순간 나는 나사 빠진 팀원과 발맞추는 셈이 된다. 이를 떠올리면 도무지 일에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이 자세 또한 회사에서 배운 것이다.

오늘의 내 마음을 정확히 기술하자면 단순히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가 아니라, ‘오랜 직장 생활 끝에 맞이하게 된 프리랜서의 삶에 만족한다’라고 할 수 있겠다. 시즌1이 있었기에 시즌2가 행복하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회사를 다니지 않고 살았다면 이 삶이 이토록 가치로운지 몰랐을 것이다. 배가 고파 봐야 음식 소중한 것을 아는 것처럼, 돈이 없어 봐야 돈이 귀한 것을 아는 것처럼. 사람은 어떤 경험을 해봐야 다음 단계를 더 지극히 여길 수 있다.

프리랜서로서 주로 집에 머물며 근래 가전과 가구를 바꾸는 데 열중하고 있다. 자취를 시작하고 사들인 저렴한 가구들이 하나둘 틀어지기 시작했고, 최저가로만 구비한 전자제품들이 슬슬 고장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제대로 된 것을 갖출 때라는 생각이 드는데, 근사한 책장이나 최신 세탁기의 만만치 않은 가격을 보며 잠시 후회했다. 처음부터 좋은 것을 샀으면 좋았을걸. 같은 물건에 돈을 이중으로 쓰다니 바보 같지 뭔가. 하지만 근 10년 만에 바꾼 전기밥솥의 밥맛이 기가 막힌 것을 깨닫고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맛없는 밥을 오래 먹은 덕에 새 밥솥을 각별히 아낄 수 있게 되었구나.

처음부터 좋은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가득 찬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매사에 결단도 느리고 먼 길을 에둘러 오는 사람에 가깝다. 이 길도 맞는 것 같아 기웃거려 보고 저 방법도 맞는 것 같아 깔짝거려 본다. 만족감은 여러 시도 뒤에 간신히 찾아온다. 이 경우 앞선 길을 실패로 규정하고 후회하기 쉽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모든 길이 최단거리일 필요는 없다고. 프리랜서의 삶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오랜 직장 생활을 해봤기 때문이고, 새로 산 의자가 만족스러운 건 금세 허리가 아파오던 싸구려 의자를 오래도록 써본 덕이다. 세상에는 둘러 둘러 왔기에 할 수 있는 경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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