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은 왜 검모잠을 죽였나? - 고구려 부흥전쟁 (6)
[고구려사 명장면-134] 한국사 교과서를 배울 때 백제 부흥운동이나 고구려 부흥운동을 공부하며 분통 터졌던 대목이 있다. 백제 부흥운동에서 주역이었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또 왕자 풍이 복신을 살해하면서 기세 좋던 백제 부흥군은 신라와 당군에게 패배하여 실패하게 된다. 고구려 부흥운동의 경우에도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로 투항하면서 부흥운동이 좌절했다.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고 뭉친 인물들이 잠시 세력을 회복하는 듯하다가 결국은 내부 분열과 배신으로 실패한 것이다. 불과 얼마 전 나라가 망할 때의 전철을 그대로 되풀이한 셈이다. 이렇듯 부흥운동이 실패하는 과정을 보면 나라가 망한 후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린 지배층이 두드러져 보인다.
눈앞의 패배와 멸망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멸망기에 지배층들은 반목과 분열이 아예 체질화된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런 멸망이 당연했던 것은 아닐까? 단지 일시적으로 그것도 일부 집권층의 무능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지만 어찌 보면 이런 어두운 역사의 자락을 들추어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더 많이 얻게 될지 모른다.
물론 고구려 부흥운동의 전개와 좌절 과정은 한국사 교과서 서술처럼 그리 간략하지 않다. 그 과정도 나름 가능한 대로 복원해야 한다. 지난 몇 회 연재에서 부흥운동의 이런저런 면을 살펴본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자료가 너무 적어서 대략의 추이만 짐작할 수 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앞서 전회에서 언급한 내용을 간략하게 환기해보자. 한성에서 안승과 검모잠이 고구려국의 재건을 외치고, 신라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면서 한성 고구려국은 당 정부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게다가 신라가 백제 땅에서 당을 무시하고 세력을 확장하더니 마침내 웅진도독부마저 공격하는 기세를 보이고 있는 터이니 더욱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당 정부는 고간과 이근행을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세력을 제압하고, 설인귀를 계림도총관을 임명해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들 원정군은 요동에서 벌어진 부흥운동 저항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671년 7월에야 안시성의 저항군을 격파하고 그해 9월에야 평양에 도착해 한성 고구려국을 공격했지만, 아무런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
퇴군한 고간, 이근행 군대가 어디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요동성이 아닐까 싶다. 평양 일대에서 유민들을 회유하던 양방언과 고간이 요동성으로 안동도호부를 옮겼다는 기사가 이를 방증한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은 이듬해 672년 7월에 다시 평양 지역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평양 일대 8곳에 군영을 설치하고 8월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여 이후 당군과 고구려 부흥군과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신라본기> 기록에 의해 이를 살펴보자.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시 백수성(白水城) 가까이 진군하여 군영을 설치하였다. 이에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군들이 연합하여 당군과 싸워 수천 명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이 후퇴하자 이를 추격하던 신라의 주력이 공을 다투어 병력을 분산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서 황해도의 석문(石門) 전투에서 당군에 격파되고 말았다. 이어 12월에는 고간이 고구려 부흥군을 백수산(白水山 혹은 泉山)에서 격파하였으며, 횡수(橫水) 전투에서도 신라군을 격퇴하였다.
이러한 전황에서 전투 지점이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이는 한성 고구려국의 존속 시기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백수성(白水城), 백수산의 위치가 논란이다. 백수성은 재령강, 또는 예성강 하류로 비정되고 있다. 우선 백수성의 위치가 재령강 일대라고 본다면, 672년 8월부터 늦어도 672년 12월까지는 고구려 부흥군이 재령강 하류에서 당군과 4개월 이상 전선을 형성하고 있으니, 고구려 부흥군의 근거지인 한성 고구려국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백수성, 백수산의 위치를 예성강 하류로 비정한다면, 당군과 전투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한성을 포함하여 황해도 일대를 대부분 상실하고 예성강 하류까지 밀려난 상황이 된다. 따라서 백수성의 위치가 어디인지가 한성 고구려국의 존속 기간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만약 백수성, 백수산이 예성강 일대라고 한다면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넓은 영역에서 단지 석문 전투만이 벌어진 셈이다. 이 점은 한성고구려국의 핵심 기반이 대동강 이남의 황해도 일대라고 생각할 때,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백수성은 재령강 일대라고 추정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즉 이때 전투는 평양에서 한성 이북의 백수성 사이 범위에서 공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한성고구려국은 672년 12월까지도 신라군과 연합하여 한성 이북 재령강 일대 백수산 전선을 유지하였으나, 불과 5개월 만인 이듬해 673년 5월에 호로하(瓠瀘河·현재 임진강)까지 후퇴하였다. 고구려 부흥군은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과 호로하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으며, 고구려유민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을 차례로 빼앗겼다.
당군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 근거지를 잃은 고구려 유민들은 결국 신라로 남하하였고, 이후 고구려 유민들의 대규모 항쟁은 일단 주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신당서' 고려전에서는 "4년 만에 고구려 유민의 반란을 평정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670년 검모잠의 고구려국 재건 이후 4년 동안 지속된 고구려 유민의 부흥전쟁이 종식된 것이다.
이렇게 한성 고구려국과 고구려 유민세력이 부흥전쟁을 4년여 동안 지속했음은 틀림없는데, 안승과 검모잠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한성 고구려국을 세운 이후 안승과 검모잠의 동향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 <자치통감>에 딱 한 줄만 보일 뿐이다. "안순[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당시 사정에 대해 이런저런 독자적인 자료를 많이 남기고 있는 <신라본기>조차도 이 <자치통감> 기사를 인용하여 기술할 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한 뒤의 사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면 안승이 검모잠을 왜 죽였으며, 안승이 신라로 투항한 시기는 언제일까? 검모잠의 죽음과 안승의 신라 투항이 곧 한성 고구려국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부흥운동의 두 주역이 빠진 한성 고구려국의 저항력이 급속하게 약화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하기는 하지만, 앞뒤 정황조차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어떤 추론도 그리 쉽지 않다. 한성을 지키자는 검모잠과 신라 금마저로 피신하자는 안승의 주장이 맞서다가 결국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하였다는 견해도 있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리고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시기도 670~673년 사이일 터인데,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필자는 어쨌거나 둘 사이 갈등도 일종의 권력 투쟁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권력 투쟁은 무언가 차지할 게 많을 때 나타나는 법인데, 망한 나라에서 이제 겨우 나라의 한 귀퉁이라도 되찾겠다고 몇몇이 모여든 데 불과한데, 뭐 그리 차지할 게 많다고 권력 투쟁을 벌였을까? 그 동기야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두 인물 사이에 최소한의 신뢰감도 갖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안승이 비록 외가로 보장왕의 핏줄이지만, 아무래도 왕통을 주장하기에는 결함이 많았을 테고, 이런 점은 못내 불안감을 일으키는 법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어쨌거나 그저 막연한 추론일 뿐이다.
그래서 조금 시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망한 나라의 부흥운동이라는 게 성공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망한 나라의 유민은 자신을 지켜주는 나라가 없다는 척박한 현실에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름 아닌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면 과연 얼마나 호응을 얻을 수 있고, 얼마나 절실할 수 있을까?
비록 조국일지라도 망한 나라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적어도 그런 나라를 꿈꾸어야 하지 않았을까? 안승이나 검모잠은 그런 뜻을 갖지 못했다. 이들을 탓하는 게 아니다. 고구려가 망하고 나서 이제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갖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이로부터 25년 뒤 대조영이 발해를 세웠다. 그 건국의 주체 세력들은 당의 영주에까지 끌려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던 유민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나라가 있어야 한다는 절박감을 누구보다 몸으로 느끼고 있었을 게다. 더욱 이제는 과거의 고구려를 다시 부흥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꿈도 키워갔을 것이다. 발해는 그렇게 건국된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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