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과거사 요지부동·방위비 증액 日기시다 정권 행보 우려스럽다
(서울=연합뉴스) 온건파로 알려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취임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개선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라는 기대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13일 참의원 답변에서 "나라와 나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국가 간 관계의 기본"이라며 강제 노역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조기에 내놓도록 강하게 요구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 문제가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는 국가 간 약속으로 모두 해결됐기 때문에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한국 내 법원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이뤄진 양국 간 합의로 모두 종결됐다는 입장을 요지부동하게 고수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시다 총리는 당시 외무상으로 협상을 이끈 일본 측 주역이었다. 이런 기류를 반영한 듯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전화 통화도 뒷전으로 밀렸다. 그는 지난 4일 취임 이후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호주, 인도 등 6개국 정상과 전화로 인사를 나눴지만, 지정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인 동시에 외교·안보적으로 매우 중요한 파트너인 우리나라의 대통령과는 열흘이 넘도록 통화하지 않고 있다. 한국이 먼저 양보하지 않으면 대화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심히 우려스럽다.
기시다 총리의 이런 행보는 다분히 오는 31일 예정된 총선(중의원 선거)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수년간 이어진 양국 간 갈등으로 일본 내의 반한 정서가 커진 데다 자민당 내 주류인 강경 보수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온건파인 고치카이(宏池會)가 무려 30년 만에 배출한 총리이다. 당내 역학 구도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어렵게 총리가 됐으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이끄는 호소다(細田)파 중심의 강경 보수 세력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당내 상황은 지난 12일 발표된 총선 공약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자민당은 "한국의 국제법 위반 상태, 역사 인식 등을 둘러싼 이유 없는 비난 등 우리나라(일본)의 주권 및 명예, 국민의 생명·안전·재산에 관한 과제에 냉정하고도 의연하게 대응하겠다"고 강변하는가 하면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판에 박힌 듯 반복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방위비 증액 공약이다. 일본은 그동안 방위 예산을 국내총생산(GDP) 또는 국민총생산(GNP)의 1% 내로 억제하는 관행을 유지했으나 이번에는 GDP 대비 2% 이상도 염두에 두고 늘려가겠다고 발표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동북아시아에 엄청난 피해를 준 나라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미·중 패권 다툼과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빌미로 군비 경쟁에 본격 가세하겠다는 공개 선언이다.
일각에서는 일본 국내적 요인들로 인해 적어도 내년 7월 참의원 선거까지는 한일 관계가 의미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당장은 당내 주류 세력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기시다 총리가 자신의 권력 기반이 확고해지는 시점까지는 몸을 사릴 것이라며 따라서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특유의 온건하고 유연한 접근을 시도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파탄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기약 없이 방치하는 것은 일국의 지도자로서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작은 것부터라도 하나씩 하나씩 물꼬를 트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의도적인 홀대나 무조건적인 강경책으로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 정부가 열린 마음으로 언제든 협의하겠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표명한 만큼 기시다 총리도 한국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은 가진 셈이다. 한일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정서도 예전보다 크게 악화했다고 한다. 국내 여론의 개선을 위한 노력은 등한시한 채 이에 안주하거나, 오히려 편승해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동북아의 미래를 함께 짊어지고 나갈 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점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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