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순·함석헌·리영희..올바른 시대의 선배들 모셔 행복했죠"

최재봉 2021. 10. 1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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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회고록 펴낸 임헌영 문학평론가
회고 대담집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펴낸 임헌영 문학평론가가 13일 오전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본업은 문학평론이다. 그는 국문학과 대학원생이던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해 <문학과 이데올로기> <불확실 시대의 문학>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같은 평론집을 펴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문학평론이 ‘본캐’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역사와 정치·사회 관련 업무는 ‘부캐’의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는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학술지 <역사비평>을 창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장으로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에게 문학과 역사와 정치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후배 문학평론가인 유성호 한양대 교수와 나눈 대화를 정리해 낸 회고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한길사)은 문학과 역사와 정치를 한 데 아우르고자 한 그의 지향을 제목에서부터 표나게 드러낸다.

대담 형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대화 진행한 유성호 교수와 간담회

‘대구 10·1항쟁’ 얽힌 가족사 공개
‘문인간첩단 조작사건’ 고문 현장 등
개인사·사회사·문학사 모두 담아
“인문학 상식 지닌 국민은 속지 않아”

회고 대담집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함께 펴낸 임헌영 문학평론가(왼쪽)와 유성호(오른쪽) 한양대 교수가 13일 오전 서울 중구 한길사 순화동천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등단하고 55년 동안 청탁받은 글만 써왔습니다. 만년에 한가해지면 제가 정말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시간이 나지 않더군요. 마침 한길사에서 이런 대화록을 내자는 제안을 하기에, 직접 쓰겠다는 욕망을 내려놓고 대화로 그 얘길 풀어내자는 심정으로 응하게 됐습니다.”

13일 오전 서울 중구 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임 소장은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내게 된 계기와 책의 내용,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 등에 관해 진솔하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인터뷰어로서 그의 말을 끌어낸 유성호 교수와 책을 낸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가 동석해 설명을 보탰다.

700여쪽에 이르는 이 두툼한 책은 임 소장의 유년기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시간 순서에 따라 회고하되 각 시기별 성격과 특징을 작은 주제로 삼아 모두 18개 장으로 구성했다. ‘카산드라의 비극’과 ‘이러려고 나라를 되찾았나!’라는 제목으로 된 첫 두 장에서 임 소장은 집안의 배경과 자신의 유년기를 강타한 1946년 10월 ‘대구 10·1인민항쟁’의 기억을 털어놓는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우리 역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삼촌들이 ‘대구 항쟁’에 관련돼서 감옥에서 고생하고 나오셨어요. 집안의 그런 상황이 어린 저로 하여금 저절로 역사와 정치를 의식하게 만든 것이죠. 제가 문학을 하게 된 계기도 결국은 같습니다. 연좌제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는 성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장사뿐이었죠. 그래서 원래는 상대를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장사에는 소질이 없으니까 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이죠.”

대구 항쟁이 임 소장의 삶에 끼친 영향을 설명할 때 그는 해방의 빛과 그림자, 미군 통치와 민중 삶의 피폐화, 그 시절을 다룬 문학 작품 등을 아울러 소개한다. 개인사와 사회사, 문학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이다.

그가 안동사범학교를 마치고 중앙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1961년 봄 미군 대상으로 초상화 행상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화는 흥미롭다. 박완서 소설 <나목>에서 자전적 주인공 ‘이경’이 했던 것과 같은 일이다. 어머니가 1990년대 텔레비전의 유명한 보일러 광고에 출연했던 일화도 재미있다. 책에는 그 자신의 사진을 비롯해 책 내용과 관련된 사진들도 실려 있어 가독성을 높인다. 1974년 문인간첩단 조작사건 때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서빙고동 보안사 분실 터에서 지난 달 임 소장이 직접 찍은 표지판 사진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수많은 방첩인들의 땀과 혼이 서려 있는 터로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이 표지석을 세운다”는 문구가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2008년 7월에 세운 이 표지석은 문구를 바로잡아 다시 세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게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우리 시대를 올바르게 사는 선배들을 모실 줄 알았다는 겁니다. 집안의 종친이기도 한 한학자 임창순 선생, 함석헌 선생, 리영희 선생 같은 분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듣고 그분들에게 배운 게 저한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한 말들도 저의 언어만은 아니고 그분들의 언어를 제가 대신 전해준 게 많습니다.”

임 소장은 지난 2005년 고 리영희(1929~2010) 선생과 나눈 대담을 <대화>로 출간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가 인터뷰이가 되어 유성호 교수의 질문에 답을 하는 쪽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리 선생님은 당신이 했던 일과 쓴 글을 위주로 말씀을 하시고자 한 반면, 저는 제 삶만이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사회와 역사 상황을 두루 다루고자 했다”고 임 소장은 밝혔다.

“이 책에서 제가 취한 방법론은 통섭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와 정치사회사, 민주화와 통일운동사, 문학작품을 함께 보자는 거죠. 그런 방법론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뭔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정치가 중요한데, 정치인들로 하여금 올바른 정치를 하게 만드는 국민의 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적어도 국민의 60퍼센트는 깨어 있어야 안정적인 민주주의와 복지사회가 가능합니다. 독서를 통해 시민의식이 함양돼 있으면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어요. 안정된 60퍼센트의 인문학적 상식을 가진 국민이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이 그런 일에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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