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 100m 줄..외국 명품·젊은 돈줄에 곪아가는 K미술판
갤러리·컬렉터 기대감 크지만
미술시장 내부 뜯어보면 기형적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는 딴 세상 얘기일 뿐이다. 한국 미술판은 지금 외국 명품과 젊은 돈줄에 출렁이고 있다.
13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에이(A)홀과 비(B)홀 앞 출입구 세곳에 각각 100m 넘는 관객들의 긴 줄이 늘어섰다.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국내 최대 미술품 장터인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의 공식 일정(15~17일)을 앞두고 브이브이아이피(VVIP) 관객만 초청하는 행사인데도 시골장터처럼 인파들로 붐볐다. 개방 시간인 오후 3시가 되자 관객들이 물밀듯 들어와 주요 출품 화랑 부스들을 훑고 다니기 시작했다. 일부 30~40대 관객들은 사전에 주요 출품작 정보를 정리한 메모장을 들고 실물과 대조하며 살펴봤다. 컬렉터 모임 회원들이 작품 앞에서 토론을 벌이는 광경도 펼쳐졌다. 이날 입장객은 5000여명에 달했다고 협회 쪽은 집계했다.
지난 3월 메이저 옥션의 경매를 기점으로 회복세로 돌아선 미술시장은 한주가 멀다 하고 열리는 온라인 경매와 아트페어 열기에 힘입어 과열이 걱정되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올해 상반기 경매 매출액만 1300억원을 돌파해 지난해 연간 총액 517억원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키아프 개막 이전부터 갤러리들마다 입도선매, 사전 예약이 상당 부분 진행됐고, 매출액 1000억원대까지 내다본다는 말들이 나온다.
미술 상인들과 컬렉터의 기대감이 크지만, 안을 뜯어보면 기형적인 단면들이 드러난다. 젊은 엠제트(MZ)세대 컬렉터들이 미술품을 주식과 부동산을 대체하는 투자재로 지목하고 시장에 뛰어들면서, 사실상 가격 등락을 거듭하는 공산품 취급을 받고 있다. 어물전 생선이나 가전제품처럼 즉석에서 골라 계산하고 인수하는 패턴이 등장했다. 인기 작가 작품의 경우 미리 선금을 걸고 예약한 작품을 다른 구매자가 전액을 치르고 가져가버리는 막무가내식 구매도 일어나고 있다.
올봄부터 메이저 경매사들이 정기 경매를 한달에 한번, 온라인 경매는 매주 벌이면서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화랑협회는 올해 말이나 내년 자체 경매를 벌이기로 최근 방침을 정했다. 전통적인 화랑가 가격 구조를 교란한다며 경매업계를 경계해온 협회가 자체적으로 경매 시스템을 출범시키겠다는 것이다. 황달성 협회장은 “경매를 남발하고 올해 창작한 신진 작가들의 작품까지 마구 거래장에 올리는 경매사들의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화랑들의 판매 권익을 유지해보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경매사들의 행태는 지나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경매를 너무 잦게 할 뿐 아니라, 올해 창작한 신진 작가들의 작품과 중견 인기 작가들의 홍보물까지 마구 내다 팔고 있다. 시장 최고액 상위 고가 작가들은 나이가 80대 중후반, 혹은 90을 넘긴 단색조 회화 일변도의 원로 작가들이거나 이른바 실험미술을 했던 이건용 유의 80대 초반 작가들 일색이다. 세계 미술시장과 다른 퇴행적 상황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우국원, 문형태, 김선우 등 일부 30~40대 소장 작가들의 유사 팝아트나 과거 신표현주의 등이 결합된 감각적 작품이 시장에서 김창열, 오지호 등 과거 근현대 대가들, 심지어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의 소품보다 월등히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하지만 왜 값이 올랐는지 자신 있게 설명하는 이는 없다. 그저 젊은 컬렉터 취향이니까, 부동산에서 떠난 돈이 몰려서 등의 분석이나 특정 세력의 작전 아니냐는 등의 억측만 나돌 뿐이다.
분명한 건 작품의 질과 수준, 가격을 결정하는 암묵적인 시장의 룰은 사실상 붕괴됐다는 점이다. 평단의 기능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됐고, 미술관이나 화랑도 작가나 작품의 잣대를 매기던 힘과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작품들의 진위, 시가 감정도 마찬가지다. 협회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 기관들이 서로 다른 안목과 시가액을 주장하며 대립을 거듭하자 국내 큰손들은 진위 판정과 거래 기록을 완비한 명품 중심의 서구 화랑 분점들을 선호하는 추세다. 지난 6월 서울 한남동에 신관을 지은 페이스와 리만 머핀, 페로탱 등 서구 화랑 분점들은 분기별 매출만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등 국내 메이저 화랑들의 판매액을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와중에 하정우, 솔비 등 일부 연예인 화가들이 이름을 앞세워 시장에 감초 구실을 하는 유망 작가로 치부되고, 방탄소년단(BTS)의 알엠(RM)은 나타나는 전시마다 관객몰이를 하는 흥행 감별사로 떠오르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화랑가와 별개로 미술계의 한 축을 이루는 공공미술관 컬렉션 전시, 10곳 넘게 차려진 지자체 비엔날레는 지지부진한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올해 초부터 열린 이승택, 정상화 등의 모더니즘 대가전과 황재형 같은 리얼리즘 작가전, 한국 미술의 디엔에이(DNA)전 등은 작가의 연대기적 맥락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거나 초점 잃은 큐레이션을 보여주기 일쑤였다.
지난 8일 재개관한 삼성가 리움의 복귀로 화랑가와 리움이 있는 한남동 일대 미술 타운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인테리어 리모델링을 빼면 전시 자체에서는 리움 특유의 기획력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평가가 많다. 새 사령탑인 이서현 운영위원장 체제의 역량에 대해 회의감을 보이는 조짐도 감지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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