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조계종 추석 선물, 전통차 아닌 커피?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1. 10. 1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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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이 OEM방식으로 납품받아 판매하는 '승소' 커피.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이 2021년 설과 추석에 선물해 스님과 재가자 사이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도반HC 제공

추석이 지난 어느날, 집에 있는 원두 커피를 갈아서 마시다가 문득 맛이 좋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커피맛을 감별할 만큼 미각이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그 커피가 제 입맛에 맞았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커피 겉봉을 보다가 “이거 진짜?”라며 살짝 놀랐습니다. 겉봉엔 ‘승소’라고 적혀 있었거든요. ‘승소(僧笑)’란, 전에도 이 코너에서 말쓰드린 적 있듯이 불교계에서 ‘국수’를 가리키는 별칭입니다. 늘 비슷한 산채 반찬만 드시던 스님들이 국수 이야기만 들어도 입꼬리부터 올라간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지요. 불현듯 짐작가는 게 있어 겉봉을 다시 봤습니다. 역시, ‘승소는 스님의 미소입니다’란 글귀와 함께 ‘대한불교조계종 ㈜도반유통 승소’라 적혀 있더군요. 도반유통은 조계종이 설립한 직영 사업체입니다. 수익금은 승려복지기금으로 쓰지요. 이 커피는 조계종 총무원이 추석에 재가자 단체 대표와 출입기자 등에게 200g짜리 2봉지씩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커피를 받을 당시에 ‘조계종이 전통 차가 아니라 커피를 선물하네?’라고만 생각하고, 당연히 커피 전문업체의 제품을 구입해 선물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제 머릿속에도 ‘불교=전통 차, 개신교·천주교=커피’ 라는 선입견이 딱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정을 알아보니 승소 커피는 조계종이 주문자상표생산방식(OEM)으로 전문업체인 ‘더나눔커피협동조합’에서 납품받는 것이었습니다. 조계종은 지난해 10월 조계사 옆 전법회관 1층에 ‘승소’ 매장도 열었고, 지난 설 명절엔 200 4봉지 1000세트를 스님과 재가자들에게 총무원장 원행 스님 명의로 선물했답니다. 추석에 다시 커피 선물을 한 것은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랍니다. 승소 매장에서는 염주, 목탁, 불화(佛畵), 불상 등 불교용품과 일종의 팬시상품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커피도 있고요.

조선 후기 차 문화를 중흥한 초의 선사 초상화와 초의선사와 교유한 추사 김정희의 글씨 '명선', 초의선사가 차를 재배한 일지암 전경(왼쪽부터). /디아모레뮤지엄 소장, 간송미술관 소장, 대흥사 홈페이지

조계종이 OEM방식으로 커피를 생산·판매하고, 명절 선물로 커피를 나누는 것은 시절 변화를 상징합니다. 중국 조주 선사의 ‘끽다거(喫茶去·차 마시고 가게)’란 화두가 있듯이 전통 차는 오랜 기간 불교를 상징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의 선사(1786~1866)는 전남 강진 일지암을 중심으로 차밭을 일구고 차를 보급해 거의 끊어지다시피했던 차 문화의 명맥을 이어 다성(茶聖)으로까지 불리지요. 그는 차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경지로 승화시켰고, 차의 미덕을 노래한 ‘동다송’이란 책도 썼습니다. 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화가인 소치 허련 등과도 교유한 분입니다. 얼마 전 입적한 쌍계사 방장 고산 스님은 쌍계사 입구의 차나무 시배지(始培地)인 야생 차밭을 복원해 차밭을 다시 조성하기도 했지요.

2021년 3월 입적한 쌍계사 방장 고산 스님과 쌍계사 차 시배지(왼쪽부터). 1975년 쌍계사 주지로 부임한 고산 스님은 방치된 차나무 시배지를 복원했다. /김한수 기자, 쌍계사 홈페이지

여연 스님은 강진 백련사를 중심으로 직접 차를 재배하고 보급하며 차문화에 대한 명강사로 이름 높지요. 한중 수교 이후에는 중국의 발효차인 보이차가 보급돼 사찰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로 스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사찰에서도 차문화가 꾸준히 이어오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사찰 살림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해서 여유있게 차를 즐길 형편은 못됐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경제가 본격 성장가도에 올라선 1980년대 이후로는 다시 사찰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확산했습니다.

최근까지도 사찰의 어른 스님들을 만나면 크고 넓적한 다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차를 나눴습니다. 그게 일반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오히려 2003년말 미국 출신 현각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다방 커피 드실래요?’라며 믹스 커피를 타주셔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현각 스님은 “미국 사람들도 한국 믹스커피 좋아해요. 맛있어요”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중년 이하의 스님들을 만나면 ‘차 드릴까요? 커피 드릴까요?’ 묻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인스턴트 커피가 아니라 원두 커피입니다. 원두를 가는 그라인더와 주전자, 거름종이 등 용품을 세트로 갖춘 스님들도 꽤 많습니다. 전문가 수준으로 커피를 내리는 스님들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 연초 지리산 자락으로 찾아뵀던 도정 스님 역시 “차, 커피 어느 것을 드릴까요” 물으시기에 “커피”라고 답했더니 스님이 분주해지시더군요. 스님은 볶은 콩이 아닌 생두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볶은 콩보다 싸다”는 이유였지요. 프라이팬에 커피콩을 볶고, 그라인더에 갈고, 거름종이에 걸러 커피를 내리는 동안 은은히 퍼지던 구수한 커피향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물론, 커피를 마시기까지 시간은 좀 걸렸지만 그 과정 하나하나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계사 옆 승소 매장 전경(왼쪽)과 내부 모습. /도반HC-김한수 기자

이렇게 스님들 사이에서도 차보다 커피가 인기를 끌다보니 조계종 직영 업체가 상품으로 개발하게 된 것이지요. 도반HC 승소사업부장이자 승소지점장 전부옥씨는 “여러 업체를 물색하고 제품을 시음한 끝에 서울 광진구의 사회적경제기업 ‘더나눔커피협동조합’을 선정했다”고 했습니다. 현재 케냐, 에티오피아, 과테말라, 콜롬비아 커피 등을 판매하고 있지요. 전 지점장은 “현재 ‘승소’ 브랜드는 국수와 커피, 생수는 ‘감로수’라는 브랜드로 OEM 생산 판매하고 있다”며 “현재까지는 국수의 판매가 가장 많지만 커피도 월 200만원 정도의 매출이 있고, 점차 늘어가는 추세”라고 말했습니다. 설과 추석에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의 선물로 커피를 맛본 스님과 재가자 분들이 인터넷으로 추가 주문도 하고 있다고 하네요.

세월이 흘러 앞으로는 사찰에서도 차보다는 커피를 더 자주 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어느날 커피에 관해 그 어떤 전문가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 ‘가선일미(咖禪一味)’를 말씀하는 스님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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