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땀이 주는 농사의 결실, 영감이 돼 글로도 남아"

문주영 기자 2021. 10. 1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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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 후 에세이 '인생 삼모작' 출간한 안병영 전 부총리

[경향신문]

강원도 고성에서 2007년부터 살고 있는 안병영 전 부총리(연세대 명예교수)는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니 병원 갈 때를 빼곤 큰 도시에 갈 이유가 별로 없다”며 “요즘엔 시골도 대형마트 등이 잘 갖춰져 있어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달 초 일이 있어 서울에 잠시 올라왔다며 지난 5일 인터뷰를 한 뒤 그날 오후 다시 고성으로 내려갔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2007년 정년퇴임 후 고성으로
한여름에도 6~7시간 농사일
틈틈이 쓴 글로 간간이 책 펴내
“머리·가슴에 와닿는 주제로 써
내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 있어”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으레 은퇴 후 시골에서의 고즈넉한 삶을 꿈꾸곤 한다. 하지만 귀농·귀촌은 제대로 된 준비와 마음가짐이 없다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안병영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80·연세대 행정학과 명예교수)의 귀촌은 성공적이다. 강원도 시골에서 15년째 여름엔 농사짓고, 겨울엔 글을 쓰며 인생 삼모작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에세이 <인생 삼모작>(21세기 북스)을 출간한 그는 지난 5일 인터뷰에서 “첫번째 일터에서 한 30년 열심히 일하고, 50대 중반에 이르면 자신이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65세 이후엔 아예 못자리를 시골로 옮겨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것이 바로 인생 삼모작”이라고 밝혔다.

서울 태생인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한 후 연세대에서 30여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학자로서 명성을 날리던 50대 중반 이후 교육부 장관직을 두 번 역임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 등을 주도했다.

2007년 정년 퇴임 후 평소 신념대로 강원도 고성으로 못자리를 옮겼다. 자신의 아호를 딴 시골집 ‘현강재’에 거주하며 농사짓는 틈틈이 글을 쓴다.

“한여름에도 6~7시간 농사일을 하는데 다들 ‘그 나이에 그게 가능하냐’고 되물어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서너 시간 일하고, 해 지기 전 두세 시간 일합니다. 힘들지만 몸 움직이는 게 마냥 즐거워요. 노동하는 기쁨도 알게 됐고요.”

고성에 왔을 때만 해도 84㎏였던 몸무게는 현재 71㎏이다. 혈압약도 끊었다. 몸을 많이 움직이고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유지한 덕분이다. 경작하는 땅은 300여평 정도로 이 중 채소밭이 30여평이고 나머지는 주로 과일나무를 심는다.

“일반적으로 아는 채소는 대부분 심어서 여름엔 반찬 걱정을 안 할 정도에요. 과수는 블루베리·오디·사과·배·감·대추 등을 심었는데 농약을 안 쓰다보니 벌레 먹고 못생겨서 수확이라고 말할 수준은 못 됩니다.”

농사일을 하다보니 사실 글 쓰고 공부하는 시간은 서울에 있을 때보다 많이 줄었다. 대신 글 작업에 대한 생산성은 높아졌다. 여름 농사일로 축적된 건강과 자연이 주는 영감, 육체노동 끝에 얻는 고도의 집중력과 사고력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몇 년에 한 권씩 나오는 저작들을 가리켜 “여름 농사의 결실”이라고 강조했다.

에세이 <인생 삼모작>은 10여년 전부터 운영해온 블로그 ‘현강재’(https://hyungang.tistory.com)에 올렸던 200여편의 글들 중 50여편을 추려 담았다. 생활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정치·사회 이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마감 압박 없이 마음이 내킬 때, 머리와 가슴에 와닿는 주제에 대해 부담 없이 쓴 글들”이라며 “그러다보니 평소 내 생각과 관점, 내 전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밝혔다.

시골살이가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19년 4월 이 일대를 휩쓴 산불로 생의 터전인 현강재가 완전히 불에 탔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 충격으로 1년간 펜을 들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갈까도 고민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집을 다시 지었다.

“제 마음을 잡아준 것은 농사일이었어요. 농터와 대부분의 과수는 큰 피해가 없었는데 농사에 전념하니 마음이 차츰 안정되더군요. 그리고 일년 정도 지나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귀농·귀촌을 꿈꾸는 이들을 향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적어도 10년 전부터는 준비해야 합니다. 또 부부 중 한 명이라도 꺼릴 경우 무리해서 오면 안 되고요. 마지막으론 도시에서 누렸던 세속적인 편의나 명예, 얼마간의 사치 등은 내려놓아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주영 기자 moon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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