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지났지만..안전한 임신중지, 왜 아직도 어렵나요?

박고은 2021. 10. 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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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낙폐, '임신중지 경험 심층인터뷰 보고서' 공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2019년 9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 맞이 임신중지 지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다시 임신중지가 필요한 상황이 된다고 해도 헌법불합치 결정 이전 경험과 실질적인 차이는 없을 것 같아요. 아직도 쉬쉬하는 분위기이고, 국회에서도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정책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없잖아요.”(2018년 임신중지 경험을 한 20대 ㄱ씨)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올해부터 ‘낙태죄’ 처벌 조항의 효력은 사라졌다. ‘낙태죄’가 사라진 세상은 그러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체 법안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 9달이 지났다. 임신중지 처벌이 사라진 자리는 성과 재생산 권리의 보장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은 12일 지난 6월7일부터 7월16일까지 ‘2021 임신중지 경험 설문·실태조사 및 심층인터뷰 결과’ 보고서를 공개했다. 370명의 설문조사 응답자 가운데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79명이었다. 79명 가운데 68명(86.1%)이 외과적 방법(수술)으로, 7명(8.9%)은 내과적 방법(약)으로 임신중절을 했다. 4명(5%)은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임신중지 경험자 가운데 13명을 심층 인터뷰한 것이다. 인터뷰에 나선 사람들은 △유산유도제 △건강보험 적용 △임신중지 의료를 제공하는 의료진 △진료거부 △배우자 동의 요구 면에서 빠른 변화와 정책 도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임신중지를 위해 유산유도제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인터뷰 대상자는 13명 가운데 4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사용된 유산유도제의 정확한 이름을 아는 경우는 없었다. 유산유도제는 지금까지도 정식 도입이 되지 않아 그 유통 과정이 불투명하다. 적절한 성분과 용량을 복용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난 2019년 유산유도제로 임신중지를 한 ㄴ씨는 비용 부담이 적은 중국산 미프진을 복용했다. 그러나 약물복용 뒤 한 달간 출혈이 지속했고 임신중지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임신중지권 옹호 활동을 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 2차 약물 복용을 하고 나서야 임신중지를 할 수 있었다. 보고서는 “접근성 확대를 목표로 한 약물적 임신중지 의료전달체계(약가 설정, 처방, 복약 및 부작용 관리체계)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비용 마련’ 부담을 줄이기 위한 건강보험 적용 확대는 필수적이다. 지금은 모자보건법 14조에서 규정하는 극도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임신중지를 할 때만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추산하는 한 해 임신중지 건수는 5만여건(2017년)인데,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출한 임신중지 관련 급여건수는 한 해 3200여건에 불과하다. 보고서에 담긴 임신중지를 경험한 79명의 설문조사 내용을 보면, 건강보험 적용을 받았다는 응답자는 6명(7.59%)에 그쳤다. ‘미적용’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66명(83.5%), ‘모름’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7명(8.8%)이었다. 임신중지 비용 부담에 대해선 20명(27.8%)이 ‘상당히 부담이 되어서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웠다’고 응답했다.

2018년 외과적 임신중지(수술)를 경험한 20대 ㄷ씨의 파트너는 수술 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임신중지를 위해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던 ㄷ씨는 “학자금 등 나가는 돈은 많은데 당장 150만원을 현금으로 가져와야 수술을 해준다고 해서 정말 막막했다”고 했다. ㄹ(39)씨는 회복실에서 파트너가 돈을 갖고 오길 기다리는 동안 불안을 느껴야 했다. 소득이 없는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했던 ㅁ(31)씨는 임신중지 뒤에도 제대로 건강관리를 하기 힘들었고, 파트너가 임신중지 사실을 부모 등 주변에 알리겠다며 수년에 걸쳐 협박했다. 보고서는 “임신중지 가격 형성과 비용 지불이 온전히 시장과 개인에게 맡겨지게 된다면 여성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층위에서 착취될 것”이라고 짚었다.

인터뷰 참가자 대부분은 임신중지 의료서비스를 받는 과정에서 수술과정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 의료진의 비언어적 표현이나 행동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이들도 있었다. 두 차례 외과적 임신중지를 한 ㅂ(32)씨는 “의사에게 과거 임신중단 경험이 있다고 얘기하는 순간 표정이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뀐다. 그때 ‘이 사람이 나를 판단하고 있구나’라고 느낀다. 이런 경험을 겪으면서 산부인과를 갈 때 같은 병원은 찾지 않게 됐다”고 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임신중지 뒤 충분한 휴식 없이 일터나 학교로 복귀해야 했던 경험도 털어놨다. ㅅ씨(39)의 경우 당시 직장에 유산휴가제도가 있었다. 객관적 조건으로는 임신중지도 포함됐지만, 직장에 임신중지 사실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유산휴가를 신청할 수 없었다. ㅅ씨는 임신중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던 경험이 장기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방광염, 골반염 등 후유증이 많이 남았다. 그때 회복을 잘하지 못한 게 원인인 것 같다”고 했다.

보고서는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편적 의료서비스로 제공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건강보험 전면 적용 △임신과 출산에 준하는 사회보장제도 적용 △정보 접근성 확대 △예비의료인 교육과정에 임신중지 의료에 대한 교육 포함 △임신중지 진료거부 금지 등을 제시했다. 나영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이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현재 입법 공백은 과거와 같은 틀로 임신중지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냐를 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권리의 공백이 있다는 게 핵심”이라며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건강권의 공백이다. 이 공백을 보장할 보건의료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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