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로 인해 신인류/구인류로 나뉜 인간, 생존 혹은 선택의 이야기..연극 '태양'

선명수 기자 2021. 10. 1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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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5일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연출가 김정의 신작 <태양>은 바이러스로 인류가 ‘밤의 인간’과 ‘낮의 인간’으로 나뉜 황폐한 세계를 그린다. ⓒ유경오


바이러스, 변이, 항체, 봉쇄. 팬데믹의 나날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다. 연극 <태양>은 불과 2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이런 단어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둘로 갈라진 디스토피아를 그린 SF이지만, 불신과 공포로 서로 접속하지 못하고 구획된 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현실과 묘하게 닮았다.

무대는 황량할 만큼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무대와 대조적인 것은 지난 세계의 잔해물을 잔뜩 매달고 있는 천장. 이 폐허와 같은 무대의 정적을 깨며 두 종(種)의 ‘인간’이 등장한다. 태양을 등지며 살아가는 밤의 인간 ‘녹스’, 그리고 낮의 인간 ‘큐리오’다.

21세기 초, 전세계에 퍼진 바이러스로 인구는 격감하고 사회 기반은 파괴된다. 그러나 몇년 후 감염자 중 병이 나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있도록 변이돼 젊고 건강한 신체를 오랫 동안 가질 수 있는 사람들, 대체로 두뇌 회전이 빠르고 진보적인 사고관을 갖고 있는 ‘신인류’다. 다만 이들은 햇빛 아래선 살 수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호모 녹센시스(밤의 인간)’, 녹스라 부르기 시작한다. 처음엔 탄압 대상이었던 녹스는 점차 늘어나 세상을 지배하게 되고, 구인류는 전체 인구의 30% 정도만 남게 된다. 도시에 자치구를 이룬 녹스와 할당받은 땅에 집락(마을)을 이뤄 살아가는 구인류 큐리오가 그럭저럭 공존하던 와중, 큐리오 집락촌인 ‘나가노 8구’에서 녹스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 후 집락촌은 녹스 자치구로부터 강제 봉쇄를 당하고, 물자와 자원이 모두 끊긴 마을은 황폐해진다. “10년이나 이어진 따돌림과 같은 봉쇄 조치”가 끝난 후, 이제 스무명 남짓만 남은 마을에 다시 녹스 사회와 교류할 길이 열린다.

연극 <태양>의 한 장면. ⓒ유경오
연극 <태양>의 한 장면. ⓒ유경오


<태양>은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알려진 일본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2011년에 첫 공연을 했다. 경기도극단 상임연출로 2018년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한 김정의 연출로 무대에 올랐다. 연극은 이제 막 다시 연결되기 시작한 두 공동체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골동품’이란 뜻의 멸칭인 ‘큐리오’로 불리는 촌락 사람들에게 녹스 사회란 공포와 두려움, 선망이 중첩된 세계이자 생존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 마을의 봉쇄가 풀리며 30세 미만의 큐리오 중 1%를 선발해 백신을 주입하고 녹스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추첨 제도’ 역시 부활한다. 신인류로 다시 태어날 기회 앞에 선 젊은이들과 이미 ‘선택 받아’ 녹스가 된 사람들. 노화와 질병에서 해방됐으나 “태양이라는, 세상에서 제일 근원적인 존재에게선 버림받”은 녹스가 되는 것만이 마땅한 길일까.

“아무리 영웅처럼 보여도, 결국은 다 기생충이야”라는 나가노8구 출신 녹스 ‘가네다’의 말처럼, 연극은 두 세계로 인류가 구획됐을지언정 인간인 이상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극중 ‘태양’은 폐허가 된 세계를 나누는 상징과 같은 존재이지만, 연극은 태양 안에 살든 그것을 등지며 살아가든 선과 악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인물들의 고민과 선택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시종일관 재치가 넘치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는 연극이다. 독특한 연출 뿐만 아니라 몸짓으로 신인류와 구인류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각각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독특한 움직임이 극에 활기와 리듬을 불어넣는다. 공연은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오는 23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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