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노리다 불복에 당한다..'이OO 방지법'까지 생긴 경선사

남수현 2021. 10. 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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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캠프 홍영표 공동선대위원장 등 소속 의원들이 11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 선거관리위원회와 지도부의 경선 결과 발표는 명백히 당헌·당규에 위배된다”며 “지도부는 즉시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해 당헌·당규 위반을 바로잡는 절차를 하루빨리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뉴스1


11일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캠프 소속 의원들은 경선 결과에 대해 공식 이의제기를 접수했다. 전날 경선이 이재명 경기지사의 승리로 끝났지만, “사퇴한 정세균·김두관 후보의 표를 무효 처리한 것은 명백한 당헌·당규 위반”이라며 사실상 결과 불복 수순을 밟기 시작한 거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의도했다면 부정 선거고, 의도가 아니라면 실수, 착오다”(김종민 의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윤영찬 의원) 등의 주장이 나왔다.

대선 경선 불복 논란은 대통령 직선제가 안착된 1992년 이후 5년마다 진영을 번갈아가며 반복됐다. 대선에서 인물·공약보다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다 보니, 선수 선발 단계의 치열한 내부 싸움이 여야와 시대를 막론하고 나타났다.


‘원팀’ 못 얻은 2012년 文


2012년 9월 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 대구지역 경선 현장에서 손학규(왼쪽), 문재인 후보가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중앙포토

민주당은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당 경선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했다. 1971년 신민당 경선 이후 41년만의 부활이었는데, 경선 흥행을 위한 장치였다. 이때는 민주당이 당무위에서 ‘중도 사퇴자의 기존 득표를 무효표로 처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당시 1위 문재인 후보는 지금 이재명 지사와 같은 ‘무효표 처리 편파 논란’에 휘말렸다.

중도사퇴자의 표를 유효투표 수에서 빼면, 그만큼 분모가 작아져 1위 후보가 과반 득표를 달성하는 게 쉬워지기 때문이다. 역전을 노렸던 손학규·김두관 후보 측에서 “결선투표제까지 만든 마당에 이런 규정을 만든 것은 특정 후보를 유리하게 하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과반 득표자의 대표성을 훼손해 결선투표의 취지를 백지화하는 것” 등의 반박이 나왔다.

룰에 대한 불만은 이후에도 앙금으로 남았고 '원팀' 구축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전직 민주당 의원은 “그때 문재인 후보가 경선 승리 후 당내 전폭적 지지를 얻었더라면, 본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3.53%포인트 차로 패배하는 아픔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뒤늦게 탈당·출마한 昌


이회창 무소속 후보가 2007년 11월 7일 오후 2시 서울 남대문로 단암빌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는 이날 한나라당에 탈당계를 제출한 후 중앙선관위에 무소속으로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중앙포토

2007년 11월 7일에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탈당 기자회견이 열렸다. 5년 전 두 번째 대선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그가 17대 대선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세 번째로 대선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명박·박근혜 두 후보 간 치열한 싸움을 불렀던 한나라당 경선이 종료된 지 석달여 만이었다.

보수표 분산을 가져올 그의 탈당·무소속 출마 선언은 당내에서 경선 불복 이상의 비판을 받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의원총회를 열어 “권력노욕 배신정치 이회창은 사죄하라”고 반발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대선 결과는 과반에 가까운 득표율(48.67%)을 얻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압승이었다. 이 전 총재는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26.14%)에 이어 15.07%로 3위에 머물렀다.

대선 경선 불복... 논란의 역사.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두 번 배신당한 盧의 승리


민주당은 2002년 최악의 경선 불복 사태를 겪었다. 레이스 초기 대세론을 형성했던 이인제 전 의원이 갑자기 불어닥친 노풍(盧風)에 경선을 중도 포기하고 대선을 코앞에 둔 12월 1일 탈당을 발표했다. 노무현 후보를 등진 이 전 의원은 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자민련에 입당하더니, 이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공개 지지해 ‘경선 불복의 아이콘’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더 극적인 두 번째 반전이 대선을 하루 앞두고 발생했다. 11월 15일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에 합의했던 정몽준 후보가 선거 전날인 12월 18일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그는 “단일화 정신은 노무현 스스로 깼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위기감을 느낀 진보 진영이 막판 결집해 노 후보는 2.33%포인트 차로 이회창 후보를 따돌리고 16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드라마를 썼다.

2002년 11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대표가 공동 유세를 펼치고 있다. 장문기 기자

선거법 개정 부른 이인제


이인제 전 의원은 15대 대선 때도 경선에 불복했다. 그는 피 말렸던 신한국당 대선 경선 2위 싸움에서 살아남았고, 막판에 1위 이회창 후보와 결선 투표까지 가 40% 넘게 득표했지만 졌다. 경기지사직까지 내던지고 뛰어든 대선 도전을 중단할 수 없다는 판단 속에 그는 50일 고민 끝에 탈당, 이회창(한나라당)-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이인제(국민신당) 구도를 형성했다.

결과는 영남권 표 분산이었다. 40.3%를 득표한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38.7%), 이인제(19.2%) 후보를 누르고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이후 2005년 공직선거법에 ‘정당이 당내 경선(여론조사 경선 포함)을 실시하는 경우 (경선에서)후보자로 선출되지 아니한 자는 (해당 선거의 본선) 후보자로 등록할 수 없다’ (57조의2)는 조항이 생겼고, 이는 ‘이인제 방지법’으로도 불렸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후보, 김대중 후보, 이인제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14대 때도 YS·이종찬 내분


1992년 민주자유당에도 ‘이종찬 탈당 사건’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이자, 민정당 사무총장을 지낸 이종찬 후보가 김영삼 후보에 밀리자 경선 이틀 전 경선 포기를 선언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 “해당 행위”라 비난했지만 그는 정주영 후보를 지지하는 길을 택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 3년 뒤에는 동교동계와 손잡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멤버가 됐다.

전문가들은 경선 불복이 반복되는 이유로 “당심과 민심의 괴리”를 꼽는다. 한국정치학회장을 지낸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2위 후보가 가능성을 당 밖에서 볼 때, 당심과 다른 일반 민심이 자기 편이라고 판단할 때 경선 불복이 나타난다”면서 “경선-본선 간 괴리가 클수록 패배한 후보자는 그 괴리만큼의 변화를 자신이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4월 27일 청와대에서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선 김영삼ㆍ이종찬 두 후보에게 깨끗한 경선을 당부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중앙포토


역대 대선에서 경선 불복을 선택한 정치인이 승리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승복은 정상적이고 쉬운 길, 불복은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라면서 “2007년 MB에 깨끗이 승복한 박근혜 전 대통령, 1971년 DJ를 화끈하게 도왔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모두 다음번 기회를 확실히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새롬·남수현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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