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대 1 아파트 당첨 됐지만.. 중도금 대출 막혀 무더기 포기

정순우 기자 2021. 10. 12.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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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가계 대출 조이기에.. 서민들 이사철 패닉 현실화
성남 한 단지선 대출해줄 은행 못 구해 당첨자 40%가 계약 포기
전셋집도 계약금 수천만원 날릴판.. 고금리 사채 끌어오기까지
"이제와서 전세대출 안된다니.. 계약금 날리고 월세방 살게 될 판"

“집주인이 재계약을 거부해 다른 전셋집을 구하고 계약금까지 냈는데, 지금 전세대출을 조이면 저희 이삿짐은 놀이터에 풀어야 하나요?”

지난 10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은행 모습./연합뉴스

지난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전세대출 규제 제발 생각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경기도 외곽에 사는 7세 아이의 엄마라고 소개한 글쓴이는 “전셋값 폭등으로 이자가 늘어난 것만 해도 힘든데 갑작스러운 규제 때문에 계약금까지 날리고 월세방에 살게 생겼다”고 하소연했다. 이전보다 2억원이나 오른 전셋집을 새로 계약했는데, 갑자기 은행 대출을 못 받게 돼 입주는커녕 미리 낸 수천만원의 계약금까지 날릴 처지라는 내용이었다.

금융 당국의 가계 대출 규제 강화로 주택 실수요자들이 ‘패닉’에 빠졌다. 지난 4년간 전국적으로 집값·전셋값이 치솟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은행권 대출이 막히면서 분양받은 아파트 입주가 어려워지고, 전셋집을 구하지 못하는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청와대 게시판 등에는 대출을 못 받아 새 아파트 입주나 청약 당첨을 포기하는 사람들, 전세 계약이 어그러지거나 사채까지 융통하는 등의 사례가 넘쳐난다. 경기도 남양주의 24평 공공분양 아파트에 다음 달 입주하려던 50대 가장은 “현실을 모르는 정부 정책이 서민들을 고금리 사채 시장으로 내몰고 있다”고 적었다. 대출 규제로 어려움에 처한 서민들의 처지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패러디한 글도 인기다. “이번 게임은 2배 오른 전세금을 조달하는 것입니다. 단, 대출은 안 됩니다. 전세 만기일까지 돈을 구하지 못하면 탈락입니다.”

정부는 “실수요자 대출도 줄여야 한다”며 추가 규제를 예고하고 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지난 6일 국정감사에서 “지금 가계부채 증가의 대부분이 실수요자 대출”이라며 “가능한 한 상환 능력 내 범위에서 종합적으로 관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 부동산 전문가는 “부동산 투기와 관련 없는 1주택자나 전세 수요자에 대한 1금융권 대출을 틀어막으면 결국 피해는 서민들에게 돌아갈 뿐”이라고 말했다.

이달 말 입주를 앞둔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 입주자들은 애초 대형 은행에서 잔금 대출을 받으려 했지만, 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금리가 훨씬 높은 새마을금고 대출을 알아보고 있다. 경기도 하남 감일지구 ‘감일스윗시티’ 입주 예정자들은 갑자기 대출 한도가 줄면서 1억~2억원을 추가로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40대 후반의 한 남성은 “2010년 말 감일지구 사전 청약에 당첨돼 11년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대출이 막혀 입주를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가을 이사철 대출 규제에 서민들 ‘경악’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청약에 당첨되고도 대출 규제로 중도금을 마련하지 못해 계약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지난달 분양한 성남 대장지구 ‘판교 SK뷰 테라스’는 평균 경쟁률이 316.8대1에 달했는데, 당첨자 292명 중 117명(40%)이 계약을 포기했다. 사업자가 중도금 집단대출을 제공할 은행을 구하지 못해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이들이 포기한 117가구에 대한 무순위 청약이 진행됐는데 4만165명이 몰렸다. 이남수 신한은행 지점장은 “청약 ‘바늘구멍’을 뚫고도 대출받지 못하는 실수요자가 포기한 새 집이 10억원 이상을 현금으로 조달할 수 있는 부자들에게 돌아간 것”이라고 말했다.

유의동 국민의힘 의원이 KB국민·신한·우리·하나 등 은행 4곳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4분기 중도금 대출 만기가 도래하는 아파트는 전국 5만6592가구에 달한다. 보통 중도금 대출은 입주 시점에 잔금 대출로 전환되는데, 지금처럼 은행 대출이 제한되면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 중 상당수가 입주 전 잔금 조달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대출 규제 피해, 서민층에 집중될 것”

이달 7일 기준으로 5대 시중은행의 작년 연말 대비 가계 대출 증가율은 이미 4.97%로 정부 목표치(6%)에 근접한 상황이다. 은행권의 ‘대출 셧다운’이 현실화하면, 1주택자나 전세 세입자 등 실수요자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전세대출 등 실수요자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정책 노력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준비 중인 가계대출 관리 강화 방안의 여파가 서민층에 집중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다주택자나 15억원이 넘는 고가 주택은 지금도 대출이 불가능하고, 전세대출도 5억원이 한도여서 비싼 전셋집에 사는 세입자는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고준석 동국대 겸임교수는 “전세금 마련이 어려워 월세살이로 전락하는 등 서민층의 주거 비용 부담만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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