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자존감이라는 덫
최근 굉장히 화제가 되었던 리얼리티 프로그램 ‘환승연애’를 보면서 20~30대 출연자들이 ‘자존감’ ‘트라우마’ 같은 단어를 일상용어로 쓰는 걸 보고 의아했습니다. 저는 그 단어들이 전문적인 심리학 용어로, 병원에서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영국 저널리스트 윌 스토의 책 ‘셀피’(글항아리)를 읽고 의문이 좀 풀렸습니다. 책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안드로이드폰에서만 매일 930억 장의 셀카가 촬영됐는데, 사진 세 장 중 한 장은 18~24세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찍은 것이라고 하네요. 1990년대 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에서는 ‘자존감’ 열풍이 일었고, 자녀의 자존감이 중요하다 생각한 부모들로부터 “넌 특별해” “년 최고야”라는 칭찬세례만 듣고 자란 MZ 세대는 자신이 너무나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인의 특별하지 못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고 책은 말합니다. 항상 자신을 관찰하고 사진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불특정 다수의 대중의 평가에 목말라하고, 반응이 없으면 좌절하는 ‘자존감 중독’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요.
저자는 고대에는 영웅의 미덕이었던 ‘완벽한 자아’가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며, 그래서 현대인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원한다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말. 사실 이것은 완벽주의 시대의 본질에 있는 음흉한 거짓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수많은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100만권이 팔린 자기계발서, 행복 전문가 등은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당신에겐 한계가 있다. 불완전하다. 그리고 이는 어쩔 수 없다.
원하면 뭐든 될 수 있다? 자존감 과잉이 MZ세대 불행의 시작
한글날, 어떻게들 보내셨습니까?
“서늘한 가을의 ‘언어 축제’라니, 얼마나 멋진가. 이 지구 어딘가에 ‘모국어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가 어느 한글날 서울에서 세종대왕 동상을 참배하러 다녀온 후 적은 문장입니다. “한국인들을 볼 때마다 더 이상 용해될 수 없는 굳고 맑은 결정처럼 단단하고 굳센 사람들이라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모국어를 향한 마음은 그 중심적인 핵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전후(戰後)세대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노래한 시(詩) ‘내가 가장 예뻤을 때’로 잘 알려진 이바라기는 50세가 되던 1976년부터 10년간 한국어와 한글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한국어를 배운 경험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묶은 책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뜨인돌)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정작 우리는 놓치기 쉬운 우리말과 글의 아름다움이 섬세하게 펼쳐집니다. 이바라기는 한국 명시를 번역한 ‘한국현대시선’으로 1991년 요미우리문학상을 받기도 했죠.
우리말의 종결어미 ‘~라’가 이바라기의 귀에는 노래처럼 낭랑하게 들립니다. 그는 ‘살아라’ ‘자라라’ ‘자라’가 반복되는 재일(在日)한국인 최화국의 시 ‘황천(荒川)’을 인용하면서 “‘라’ 음을 기조로 한 아름다운 울림은 마치 강이 흐르는 소리 같다”고 썼습니다. “실제로 ‘잘 자라’ 하고 노래하듯 억양을 붙여 손자에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이가 아니라도 ‘자, 느긋하게 자볼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듯한 자애와 안심감을 주는 소리였다.”
‘~라’를 아름답다 느껴본 적이 있던가요? 일본인에겐 부드러운 물결처럼 들린다는 ‘~라’를 ‘~해라’ ‘~하지 마라’ 같은 삭막한 명령의 말로만 사용하던 언어습관을 반성해 보았던, 한글날 연휴였습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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