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스스로 제 이름을 얻을 때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이주현ㅣ이슈부문장
1년 전 요맘때였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만드는” 인터넷 언론 <마인드포스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신장애인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문예전을 주최하려고 하니 심사위원을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해 봄 조울병 병력을 담은 책을 낸 터라, 기자라는 직업도 감안해 글쓰기 심사를 청해온 듯했다.
당시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뽑은 대상작은 30년 가까이 정신요양시설에서 지낸 한 여성 조현병 환자의 에세이였는데, 특히 요양시설 동료들의 변화를 묘사한 이 대목이 나의 눈길을 붙잡았다.
“자유롭게 버스교통카드를 소지할 수 있게 하여 자율적인 마트 이용, 파마 미용, 영화관람, 은행 이용하기, 시장 장날에 참여해보기. 해외여행 3박4일 동안 우리나라 밖에서 잠을 자보기. 비행기 타보기…. 우리는 날개를 달고 쭉쭉 뻗어나갔다. 처음 비행기를 탑승하였을 때의 그 기억은 짜릿한 마음의 평화를 함께하였다.”
짜릿한 평화. ‘무능한 존재’이거나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존재’로 낙인찍히는 정신장애인들에게 가장 간절한 감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 제로 상태로 통제되지 않는, 적절한 수준의 모험이 수반되는 일상. 약물과 치료 외에도 사회적 관계를 통해 존재감을 회복하는 삶.
최근 들어 부쩍 정신장애인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고통이 스스로 제 이름을 얻으려는 정체성 투쟁이다. 출판계에선 이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연성 콘텐츠’를 훌쩍 넘어섰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마음의 병’이라는 매끄러운 말에 어색하게 감춰져 있던 중증 정신질환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 망상 및 환각, 자해와 자살 시도의 경험을 증언한다. 그리고 동료 환우와 가족, 사회를 향해 외친다. ‘이제 우리가 말을 하겠다. 그러니 우리의 말을 들어봐라.’
이런 흐름은 정신장애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움직임과도 맞닿아 있다. 지난 5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한울정신건강복지재단,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등 20여개 단체가 뭉친 ‘정신장애인 복지서비스 차별 철폐를 위한 장애인복지법 15조 폐지연대’가 출범했다. 이들은 지난 2000년 ‘장애인복지법’ 개정 때 정신질환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어려운 정신장애인들이 ‘장애인’ 범주에 포함됐음에도, 같은 법 15조에 정신장애인에 대해선 법 적용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기는 바람에 정신장애인들이 각종 복지서비스에서 소외되는 결과가 빚어졌다고 지적한다. 15조는 본래 ‘정신건강복지법’과 ‘장애인복지법’의 중복 수혜를 막기 위한 조항이었는데, 훨씬 과도하게 해석이 되고 있다는 거다. 가령, 정신장애인 전용 직업재활시설을 만들려고 하면 담당 공무원들이 ‘15조’를 내세우면서 장애인복지법상 근거가 없는 시설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무엇보다도 15조 폐지연대가 가장 위기의식을 느끼는 지점은 정부의 ‘장애인 탈시설화 로드맵’엔 정신요양시설 및 의료기관에 입원해 있는 약 7만여명이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장애인들이 장애인의 지위를 ‘오롯이’ 획득할 때에야 정신장애인들의 사회 복귀의 길도 열리는 셈이다.
다행히 국회나 정부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장애인복지법 15조 폐지 개정안을 낸 데 이어,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도 며칠 전 국회 국정감사 때 이와 관련해 “공감한다”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간 정신질환자들의 의료·복지 시스템은 관련 업계·단체 간 숱한 이해관계의 자장 속에서 변화해왔고, 이번에도 이해주체들의 힘겨루기가 치열할 터이다. 정신장애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만한 준비 역시 부족하다. 15조 폐지운동, 더 나아가 정신장애인 탈원화의 길이 순탄치 않아 보이는 이유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진다. 마음의 낭떠러지에서도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조정하려고 애썼는지,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그도 아니면 절망했거나 고통받았는지”(<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중)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병체성의 정치’가 시작됐다.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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