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대한민국

한겨레 2021. 10. 1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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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숨&결] 이주희ㅣ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80년대 초 내가 한강 근처 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 대통령이 외유를 나갈 때마다 우리는 마포대교를 건너 길가에 서서 종이 태극기를 흔들어주고 다시 걸어서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차량이 전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씨가 찰나의 순간 차 안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우리는 더위 혹은 추위 속에 반나절 이상을 그 일에 소비했다. 국가가 독재와 반독재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기였다. 민주화로 그나마 요즘 학생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라 위안 삼던 몇 년 전, 대통령 탄핵으로 태극기 집회의 충격적인 영상과 메시지를 마주쳐야 했다. 탄핵 찬성과 반대 세력으로 나라가 다시 두 동강이 났다. 태극기의 의미도 미묘하게 변화되었다.

촛불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합된 대한민국을 기원했었다. 그러나 최근 대선 정국에 펼쳐지고 있는 여러 사건은 우리 국가의 본질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기득권은 독재국가의 총칼을 통해 지켜졌을 때보다,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외피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우리는 과연 몇 개의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일까. 최소한 두 개의 대한민국이 보인다. 기득권 세력과 기득권으로부터 피해를 받는 사람들.

대장동 특혜 의혹 사건으로 수십, 수백억의 뇌물성 현금이 오고 가는 와중에서 사퇴한 보수정당 국회의원 아들의 “열심히 일한 대가”라는 해명은 단연 압권이었다. 어차피 불평등은 만연하며 천문학적인 이윤이 나서 그걸 누구에게 주든 말든 그것은 사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일반 노동자와 전문경영인과의 보상 격차가 이렇게 큰데, 젊은 노동자가 그 부스러기를 좀 받아간 것이 무슨 큰 잘못이란 말인가. 시장은 실패할 리 없다. 다 기획과 “설계”를 잘못한 공공부문 때문이다.

보수언론과 재벌, 저명한 법조계 인사, 그에 부역하는 정치가와 학자, 공무원에 이르는 광범위한 기득권 카르텔이 ‘그들만의 리그’를 운영하는 동안 또 다른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계속 일하다 목숨을 잃도록 방치되었고 한계에 다다른 자영업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부의 소유가 권력의 소유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마이클 월저의 복합적 다원주의의 사회가 아닌 듯하다. 하나의 가치가 다른 가치로 전환되지 않기 위해서는 각각의 가치 영역에 부합하는 일관된 제도의 기획과 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와 실천은 예측 불가능한 역사적 구성물이다. 월저는 중첩적 지배를 방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우리는 식민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분리된 두 세계를 경험했던 국가다. 프란츠 파농이 예견했듯이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의 시민 사회가 존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는 반식민 투쟁이 식민 세력 자체에 대한 투쟁과 피지배 사회 내에서의 헤게모니 투쟁, 이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식민 세력은 몰아내었으니 이제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할 시기다. 식민 지배의 폐해는 인적, 물적 자원의 약탈보다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상흔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드러난다. 어쩔 수 없이 기득권에 순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긴 기간 동안, 선진국에 대한 모방 없이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기획해낼 수 있는 자존감은 낮아졌고 약자를 돌아볼 여유는 잃어버렸다.

가난이 스펙이 아닌가? 그렇다면 권력자 엄마도, 부자 아빠도 스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난은 스펙이 아니지만, 가난의 고통을 통해 가난이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알아냈다면 그것은 중요한 스펙이다. 공무원이 자신의 계급적 배경을 넘어 약자의 어려움에 공감할 때, 학자가 지성을 통해 고통을 발견하고 해결하려 노력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가가 기득권이 아닌 하나의 대한민국을 위해 정치를 할 때 아마도 태극기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과 의미가 하나로 수렴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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