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본 호찌민시 '비밀의 방' 보고 베트남 역사 탐구 결심했죠"

강성만 2021. 10. 1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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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유일상 명예교수

9년 전 정년퇴임을 한 언론학자 유일상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0여 년 동안 베트남을 50회 가까이 여행했다. 한번 가면 길게는 2~3개월까지 시간을 두고 베트남 곳곳을 훑었단다. 그는 1967년부터 2년 동안 해군 수병으로 베트남 전쟁을 겪은 참전 용사이기도 하다. 전쟁 때 상관 지시로 고엽제를 뿌리기도 했던 그는 40대부터 고엽제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신체 고통을 겪으며 지금도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

처음 베트남 여행을 할 때는 자신이 속했던 해군 백구부대가 작전을 펼친 호찌민(옛 사이공) 등 남베트남(월남)의 항구와 포구를 주로 둘러 볼 작정이었지만 마음을 바꿔 중·북부까지 찾았단다. 이 여행의 결실이 그가 최근 낸 책 <베트남 역사문화기행>(하나로애드컴)이다. 지난 6일 서울 청담동의 연구실에서 저자를 만났다.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표지.

책은 여행서이지만 그 중심에는 ‘베트남 민족 자주의 역사’가 있다. 130쪽 분량으로 책 앞쪽에 실린 ‘간추린 베트남 역사’도 19세기 말 프랑스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베트남 민중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고투에 초점을 맞췄다.

먼저 왜 그토록 베트남 여행과 역사 공부에 힘을 쏟았는지, 물었다. “여행 초기 방문한 호찌민시에서 바로 이 나라가 베트남 전쟁 때 허수아비 국가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로 쓰던 호찌민통일회관을 보니 대통령과 부통령 집무실 사이에 미국 대사 집무실이 있어요. 안내 책자에는 ‘비밀스러운 방’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제가 대학에서 언론법제론을 가르칠 때도 베트남전 미국 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를 자주 언급했지만, 이 정도로 (남베트남이) 자주성을 잃은 줄은 몰랐어요. 그 때부터 이 나라 전체를 다 둘러보고 역사도 제대로 알아보자고 생각했죠.”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에 있던 미국 대사 집무실. 유일상 교수 제공

책에는 독립 영웅 호찌민(1890~1969)과 보응우옌잡(1911~2013) 장군 등 베트남 현대사 이해에 필수적인 인물은 물론 1953년 보응우옌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군이 미국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을 격퇴한 디엔비엔푸 전투 등 이 나라 민중이 외세와 맞서 싸운 여러 전투 개황도 상세히 담겼다. 그는 호찌민이 1945년 9월에 발표한 베트남 독립선언문도 직접 번역해 실었다.

자료는 어떻게 구했을까? “초빙교수로 머물렀던 미 오리건대학에 아시아 자료가 많았어요. 일본 도쿄대와 프랑스 쪽 자료도 많이 참고했죠. 베트남 현지 자료는 여행 중 만난 통역이나 한국 성수동에 많이 사는 베트남 분들에게 통·번역을 부탁해 활용했어요.”

그는 언론학을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부터 베트남 역사가 학문적 관심사였단다. “1970년대 초 서울대 신문대학원을 다닐 때 한국 최초 신문 <한성순보>(1883년 창간)를 보니 베트남 망국에 대한 글이 많았어요. 조선이 일본에 먹히는 과정이 베트남이 프랑스에 먹히는 것과 비슷해요. 청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1884년에 프랑스와 맺은 1차 톈진협약으로 포기합니다. 조선에 대해서는 청일전쟁 뒤인 1895년에 청이 종주권을 포기했으니, 조선보다 11년 전이었죠. 1885년에는 베트남 외교권까지 프랑스로 넘어가죠.”

대학 때 해군으로 ‘참전’…고엽제 후유증
40여년만에 옛 사이공 등 작전지역 방문
“월남 대통령관저에 미 대사 방이라니”
지난 10여년 50여차례 전국 답사
최근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펴내

“민족운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 인상적”

베트남사에서 뭘 배워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민족 자주 그리고 민족 운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이라고 답했다. “베트남은 국망 뒤 민족을 위해 외세를 영리하게 활용했어요. 호찌민은 사회주의자이지만 2차 대전 때 미 첩보부대(OSS)와 힘을 합쳐 대일항쟁을 했죠. 베트남 지역에서 포로가 된 연합군을 데리고 직접 미군이 있는 중국 윈난을 찾기도 했죠. 2차 대전 뒤에는 북베트남에 남은 일본군과 프랑스군을 끌어들여 베트남 군대 훈련을 맡겼어요. 1986년 도이모이(개혁 개방) 정책을 펴고는 한때 적이었던 한국과 딱 손을 잡았죠.” 이런 말도 했다. “베트남에 고엽제가 살포된 것은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이 1961년 미국에 요청했기 때문이었어요. 허수아비 통치자이지만 고엽제 살포에는 그의 뜻이 반영됐어요. 지금도 작전권이 미국에 있는 우리는 어떤가요. 1960년대 후반부터 몇 년간 휴전선 일대에도 고엽제가 살포됐는데요. 우리 뜻일까요. 지금도 이 문제는 1급 군사기밀로 묶여 있어요.”

고려대 불문학과 2학년 때 입대한 그가 자원해 베트남 전쟁터로 간 데는 “프랑스 작가이자 문화부 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처럼 참여해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단다. “이왕 병역 의무를 치를 거라면 죽도록 고생하고 싶었어요. 그때 틈틈이 쓴 일기나 메모가 이번 책 집필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는 베트남에서 보낸 복무 기간을 “노예 같은 생활”이었다고 기억했다. 유신 때 정부 비판 발언을 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감옥이 군 복무 때보다 훨씬 편했다”고도 했다. “제가 탄 탱크상륙함(LST)이 2차 대전 퇴역함정인데 상태가 형편없었어요. 뜨거운 햇볕 아래서 갑판 녹을 벗겨내고 페인트를 칠하고 또 갑판과 육상을 오가며 쉴 새 없이 무거운 짐을 옮겨야 했죠. 그때 너무 고생해 ‘훗날 성공해 꼭 베트남에 다시 오자’는 생각까지 했었죠.”

베트남전 수병 시절 유 교수 모습. 유일상 교수 제공

한때 적군이었던 한국군 수병의 베트남 여행에 대해 현지인들은 어떤 반응이더냐고 하자 그는 “거부감은 없다”고 말했다. “너희들은 미군이 오니까 따라 온 것 아니냐고들 해요. 다 지난 옛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죠. 특히 베트남 지식인들은 한국과 베트남 역사가 비슷하다고 한국에 더 호감을 보입니다.”

요즈음 그는 밤을 새워가며 미얀마 국영 매체의 보도를 우리말로 옮기며 미얀마 정세와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한국 언론의 미얀마 보도가 너무 서방 시각에 치우쳐 있다는 생각에 군부 시각을 담은 뉴스를 국내에 소개하고 있어요.”

그는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남인도 여행에 나설 계획이라고 했다. “남인도는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곳입니다. 프랑스는 여기서 영국과 합의해 인도차이나 반도로 눈을 돌렸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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